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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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우리] 해양지정학의 도전과 평화 향한 아세안의 응전

중 확장세에 미 중심 서방 반격
아세안 주도 협력기제 힘 빠져
새로운 印太 전략 도출할 시기
대결 아닌 병존·협력 지향 필요

대항해시대 범선을 앞세운 유럽 열강의 인도항로 개척은 지중해를 넘어 인도양과 아시아·태평양의 신대륙을 발견하고 현재의 세계지도를 만드는 발단이 되었다. 유럽의 탐험대들은 동남아로 향했고, 1511년 포르투갈의 말라카 왕국 점령은 동남아의 식민 시대를 여는 첫 사건이 되었다. 식민 시대를 거친 이후 독립 국가로 등장한 동남아 국가들은 냉전기의 불안정한 국제 질서 속에서 1967년 8월 동남아국가연합, 아세안(ASEAN)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동남아, 그리고 이들 10개국이 모인 아세안은 해양지정학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세안은 냉전기 미국이나 소련이 제창한 지역 협의체에 참여하는 형태가 아니라, 지역 국가들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독자적 협의체다. 아세안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지닌 역내 회원국과 역외 대화상대국을 규합하여 공동의 선을 창출하는 시스템을 고안해냈다.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 1994년),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 1996년), 아세안+3 정상회의(APT, 1997년),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2005년), 아세안확대국방장관회의(ADMM-Plus, 2010년),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2022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를 통해 냉전기에는 미국과 소련, 탈냉전기에는 일본과 중국까지 아세안이 중심이 되는 지역 질서 속에 초대하여 상호 합의에 의한 협력의 규범을 만들고 안정과 번영을 모색하는 역할을 하였다.

최윤정 세종연구소 인도태평양연구센터장

그런데 올해 8월8일 창설 55주년을 맞은 아세안 앞에는 수많은 도전 과제가 놓여 있다. 가장 큰 도전 중 하나가 해양지정학의 귀환이다. 중국이 현상 변경을 노리는 해상 세력으로 인도양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자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은 이를 저지하는 연합 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미·일·인도·호주 4자 협의체 쿼드(Quad)와 미·영·호주 3자 협의체 오커스(AUKUS)가 대표적이다. 경제적으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다자 협의체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출범을 위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아세안이 주도한 협력 기제들은 힘이 빠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례로 RCEP은 2022년 1월 발효되었으나(한국은 2월, 말레이시아는 3월) 아직 아세안 3개국(인도네시아·필리핀·미얀마)은 비준을 하지 않은 상황이다. 우려했던 대로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이 크게 늘어났고, 필리핀에서는 인도처럼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옳지 않았는가 하는 비판적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산 부품 소재를 활용한 제품의 미국 시장 진출에 향후 제동이 걸릴 가능성도 있다.

이에 아세안은 2019년 자체적인 인도태평양전략(AOIP)을 발표한 이후 아세안이 지역 안보와 경제 협력의 중심이 되기 위하여 아세안의 운영 원칙과 협력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까지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다. 마침 2023년 아세안 의장국은 인도네시아다. 아세안이 인태전략을 도입하게 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도네시아가 한층 거세진 지정학의 도전을 극복하는 데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 지 궁금하다.

인도태평양 지역을 둘러싸고 발표되는 수많은 전략들이 대결보다는 병존과 협력을 지향한다면 포용적 해법을 만들기 위한 아세안의 방식과 역할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미 인태전략을 발표한 대부분의 국가들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도 아세안의 대화상대국이다. 새로운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국가들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논의할 수 있는 토대는 아세안에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한국은 8월 4∼5일 박진 외교부 장관이 한·아세안, APT, EAS, ARF까지 총 4개의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하여 윤석열정부의 아세안 중시 기조를 강조한 바 있다. 아세안 협의체 발전에 기여하는 파트너십을 개발하고 AOIP와의 접점을 확대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지정학의 도전에서 아세안이 평화와 번영의 해법을 찾아가는 길에 한국이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윤정 세종연구소 인도태평양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