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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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칼럼함께하는세상] 그를 만났습니다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들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결혼이민여성의 남편이자 다문화가정 자녀의 아버지이다. 아내들이 결혼생활의 어려움이나 생활고를 이야기할 때, 자녀들이 학교생활에서 뒤처지고 문제행동을 보일 때 더욱 만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주말에도 일 나가요.”

만나서 이런 얘길 하고 싶었다. 아내가 한국말이 서툴러도 집안일 같이 의논해서 결정하셔라. 한국말 유창한 아버지가 아이들과 얘기 많이 나누셔라. 그 말이 하고 싶어 부모교육도 계획해보고 가족 나들이도 가자고 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주말에도 일 나가요”였다. 돈 버는 일에 밀려서 무엇이 더 중요하느냐는 말은 하지 못했다.

정종운 서울 구로구가족센터장

다문화가정은 아이들이 클수록 엄마의 지도력이 약해진다. 자녀들이 엄마의 언어를 능가하고 엄마의 경험과 전혀 다른 학창 시절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육과 교육은 엄마 몫이다. 최근에 미국의 부부 인류학자가 쓴 책 ‘부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이럴 때 제목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뼛속 깊이 젖어 있는 양육이론과 몸을 담고 있는 경쟁사회를 생각하면 이내 흔들린다. 아버지의 견인이 필요하다.

주말에 일 나가도 만날 방법을 궁리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집에서 아이들과 놀 수 있는 놀잇감을 제공하는 대신 아버지가 직접 물품을 받으러 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카톡으로 놀이 사진과 소감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스무 가정을 선정하고 참여시키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드디어 아버지들이 첫 번째 놀잇감 배드민턴 라켓을 받으러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발걸음을 한 후에야 알았다. 한 발짝 떼는 게 왜 이렇게 어려웠는지.

아버지들은 나이가 많았다. 50대 이상이 절반이나 됐다. 60대가 세 명, 50대가 여덟 명. 초등학생 아버지 같은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담당 직원이 밤낮없이 전화해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찾아온 눈치였다. 어렵게 어렵게 물품을 받아 갔는데 날짜가 지나도 사진이나 소감을 올리지 않았다. 다시 전화 공세를 받고서야 겨우 사진을 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말했다. 아이랑 이런 놀이 처음 해봤다. 아이가 너무 좋아했고 아버지도 즐거웠다고, 편의점에 들러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기분 좋았노라고 했다. 이런 놀이가 처음이라니! 이 아버지들이 정말 주말에도 일 나간 게 사실인가 보다.

놀이활동에 대한 반응을 들으면서 만혼에 늦둥이를 얻은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의 만혼은 나이 차이 나는 국제결혼이었다. 축하에 곁들여 우려와 빈정거림을 몇 차례 듣고 나니 결혼 사실을 알리기 싫었을 것이다. 만혼은 했으나 처자식 거두고 살 만큼 준비된 건 없으니 늦둥이를 얻은 기쁨이 삶의 무게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 귀에 대고 ‘아내와 대화하세요’ ‘아이들과 놀아주세요’ 센터에서 전하는 목소리가 가닿지 않았나 보다. ‘부부상담에 오세요’ ‘부모교육에 오세요’ 센터에서 걸려 오는 전화에 ‘일 나가요’가 최선의 답이었나 보다.

이번에는 그들이 저녁마다 아이와 배드민턴을 치다가 젠가 블록을 받으러 왔고 바둑알을 받으러 왔다. 발걸음이 좀 가벼워졌다. 이렇게 만나야겠다.


정종운 서울 구로구가족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