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기상이 일상화된다는 점을 고려해 현재의 재난 관리 체계를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9일 ‘집중호우 대처 관계 기관 긴급 점검회의’에서 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당시 회의에서 “이번 집중호우는 시간당 강수량이 우리나라 기상 관측 역사상 최고 기록을 갱신하는 등 기후변화로 인한 이상 기상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전날 밤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반지하 주택에 살던 일가족이 숨지고 퇴근길 도로가 침수돼 차량 수백대가 물에 잠기는 등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은 8월31일 기준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게재된 ‘대통령의 말과 글’ 50건 중 ‘기후변화’가 최초로 언급된 건이다. 그간 윤 대통령이 해외 정상·고위당국자를 만난 자리에서 양국 협력을 도모해야 할 분야로 ‘기후변화’를 언급한 경우는 더러 있었으나, 정부 회의에서 이를 강조한 건 드물었다. 서울에서 홍수가 난 지 일주일 지난 8월15일 윤 대통령은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다시 한 번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기후변화”를 언급하며 “첨단과학 기술 접목으로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재난이 기후변화를 대통령의 입에 오르게 했다.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재난을 즈음해 이전보다 기후변화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하고 걱정했다. 그간 쉽게 감지할 수 없어 추상적으로만 느껴진 기후변화가 시간당 141.5㎜(8일 오후 8시5분∼9시5분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기준)에 달하는 역대급 폭우로 서울을 할퀸 뒤에야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로 대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심과 걱정은 지금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기후변화를 최소화하기 위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이나 앞으로 더 빈번해질 기후재난에 대한 적응력 제고와 같은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관심과 걱정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재난은 우리에게 공포를 안기지만, 그게 행동을 무조건 보장하는 건 아니다. 거기엔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폭우 이후 폭증한 ‘기후변화’ 언급량
폭우 피해와 관련해 우리 사회의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도 추이를 살펴보기 위해 ‘기후변화’의 온라인 언급량을 분석해봤다. 예상대로 폭우가 내린 직후 언급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모습이었다. 다만 이런 추이가 폭우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데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썸트렌드’로 최근 한 달(7월30일∼8월29일) 동안 ‘기후변화’에 대한 온라인 언급량(뉴스·블로그·인스타그램·트위터)을 분석한 결과 빈도가 가장 높았던 때는 역대급 폭우를 기록한 다음 날인 8월9일로 5390건이 집계돼 하루 평균 건수(약 1287건) 대비 4배 이상이나 됐다. 같은 날 ‘기후위기’에 대한 언급량도 8504건으로 하루 평균(약 1223건) 대비 7배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승세는 서울 폭우 피해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수그러들었다. ‘기후변화’ 언급량은 9일 정점을 찍은 뒤 10일 1432건, 11일 1191건, 12일 821건, 13일 563건 등으로 이후 등락을 보였지만 최고 빈도를 기록한 9일 언급량에 한참 못 미쳤다. ‘기후위기’ 언급량 또한 10일 1780건, 11일 799건, 12일 540건, 13일 386건 등으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은 결국 폭우라는 기후 재난에 우리가 직접적인 피해를 봤기 때문이었다. 그건 ‘기후변화’에 대한 긍·부정 단어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한 달간 ‘기후변화’와 연관된 긍·부정 단어 중 가장 언급량이 많았던 게 바로 ‘피해’(4808건)였다. 네 번째로 많은 게 ‘최악’(1492건)이었고, 이어 ‘재앙’(1461건), ‘위기’(1176건), ‘비상사태’(1158건) 등 순이었다.
재난이 끌어낸 관심은 자연스레 우리 사회가 기후변화 대응에 나서도록 만들 수 있을까. 폭우 피해를 겪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단정하긴 어렵지만, 일부 기후변화 대응 수단에 대한 온라인 언급 양태를 분석해보면 회의적인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각각 수단을 이행하는 데 있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형태의 ‘부담’이 우리 사회가 행동하는 걸 주저하게 한다는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실제 에너지 부문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을 위한 대안으로 평가받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최근 한 달간 긍·부정 단어 분석 결과를 보면 ‘부담’이 1040건이나 언급돼 두 번째로 빈도가 높은 ‘달성하다’(191건)의 5배 이상을 기록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온실가스 총배출량인 6억7960만t(잠정치) 중 에너지 부문 배출량 비중은 86.9%(5억9060만t)였다.
자원 순환 측면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일 수 있는 제도로, 그 시행을 세 달여 앞둔 ‘일회용컵 보증금제’ 또한 ‘재생에너지’와 마찬가지로 ‘부담’이란 단어와 엮여 논의되는 모양새였다. 전체 언급량 수를 고려해 최근 세 달(5월30일∼8월29일)간 긍·부정 단어를 분석한 결과 ‘부담’(50건)이 가장 빈도가 높았고, ‘반발’(3위·28건)이나 ‘반발하다’(9위·13건)도 자주 언급된 것으로 나타났다. 일회용컵 보증금제는 애초 올 6월 시행 예정이었으나 자영업자 부담 문제로 여론이 악화하면서 오는 12월2일로 시행일이 늦춰졌다. 일회용컵 보증금제로 재활용이 활성화될 경우 컵 소각 시와 비교할 때 온실가스가 66% 넘게 줄어든다고 한다.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리더십’과 ‘희망’”
“기상이변과 무더운 여름은 사람들이 직장 정수기 앞이나 가정의 저녁 식탁에서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에 기후변화를 끼워 넣게 만든다. 다만 그러다 날씨가 선선해지면 경기침체, 유행병, 테러 공격과 같은 새로운 위기가 나타나 언론과 정치적 관심을 끈다.”
이는 호주의 사회과학자 리베카 헌틀리가 쓴 책 ‘기후변화, 이제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할 때’(올해 2월 국내 출간)에서 호주인 대상으로 기상 재난이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를 고취하는지에 대해 연구한 결과를 언급하면서 한 설명이다. 그는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동향연구소인 마인드 앤드 무드 리포트(Mind&Mood Report) 이사로 9년간 활동하며 기후변화 관련 인간 심리를 연구해온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호주를 ‘청정국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수년 전부터 한국과 함께 ‘기후악당’으로 지목된 나라 4곳 중 1곳이다. 국제시민단체인 ‘기후행동추적(CAT)’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호주는 효과적인 기후 정책을 시행하지 않고 재생에너지 투자도 충분히 늘리지 않으며 탄소중립 목표를 채택할 의향도 보이지 않는 나라로 평가됐다. 실제 2020년 호주의 발전량 중 화석연료 비중은 77.4%(IEA 집계)나 됐다.
그런 호주는 2019년 9월부터 2020년 2월까지 장장 5개월여간 ‘블랙 서머(검은 여름)’라 불리는 대규모 산불을 겪었다. 당시 화재로 우리나라 면적의 2배가 넘는 2400만㏊ 이상이 탔다. 33명이 숨졌고 이재민이 수천명 발생했다. 헌틀리는 책에서 자신의 연구와 함께 다른 여러 연구 결과를 인용한 뒤 “우리가 기후변화를 확신하고 우려하는 정도는 기온과 함께 오르내리며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태풍, 산불, 홍수가 점점 자주 일어남에 따라 높아질 수 있지만, 그간 여론 반응 속도를 고려하면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지적했다. 재난 자체만으로는 여론을 완전히 바꿔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호주는 결국 변했다. 블랙 서머 이후 2년여 지나 올해 5월 치러진 호주의 하원 총선에 대해 외신은 일제히 ‘기후선거’라고 평가했다. 집권당이던 자유·국민 연합이 8년 만에 중도좌파 성향의 노동당에 정권을 내줬는데, 기후변화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 패인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녹색당은 창당 이래 최대 의석인 4석을, 중도파 환경주의 성향의 무소속 선거 연대인 일명 ‘청록파(teal)’는 10석을 차지했다.
투표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행동 중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가장 세다. 블랙 서머 이후 호주 사회는 그저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우려에 머무른 게 아니라 개개인이 기후변화 대응에 가장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에 나선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나아가게 한 걸까. 헌틀리는 기자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 질문에 대해 ‘리더십’과 ‘희망’을 꼽았다.
그는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사실을 신뢰하는 호주인들은 대형 산불과 심각한 홍수를 겪으면서 그 확신을 더 강화했다”면서 “그러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후변화의 징후가 무시되거나 오독될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 블랙 서머는 기후변화에 따른 인도양 동쪽의 가뭄 심화가 영향을 미친 것이라는 기상학계의 지적이 나왔으나, 당시 집권당 소속인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신년사에서 “이전부터 비슷한 재해를 겪어 왔다”며 기후변화와의 연관성을 에둘러 부인했다. 헌틀리는 이와 관련해 “증거가 명확한 데다 진실을 마주하더라도,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며 “그래서 정치인들이 재난과 기후변화의 연관성을 지적하도록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리더십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재난이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걸 한 개인이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대응을 위한 행동에 나서는 건 또 다른 문제다. 헌틀리는 “호주 사회에는 기후변화를 매우 걱정하지만 우리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냉소하는 그룹이 6% 정도 규모로 있다”며 “이들은 결국 냉소주의가 덜한 사람들보다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행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작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 또한 재생에너지나 일회용컵 보증금제에 대해 ‘부담’을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는 건, 결국 그걸 감내할 만큼 기후변화 대응 행동이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느냐는 냉소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헌틀리는 이와 관련해 “기후변화라는 문제의 규모에 대해 계속 교육할 필요가 있다”며 “행동을 통해 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볼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5월 호주 하원 총선에서 무소속 선거연대 ‘청록파’가 10석을 확보한 결과에 대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행동의 성과인 동시에 개개인의 행동이 결국 문제를 해결해낼 거라는 희망을 보여준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헌틀리는 “호주인 1000여명이 처음으로 그들의 캠페인을 자원해 도왔고, 그게 호주 정치 문화를 하룻밤 사이에 바꿨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기후변화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소규모라도 모여서 행동한다면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호주 사회가 목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