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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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와우리] 북한의 친러 행보와 한반도

동북아 30여년 만에 새판짜기 돌입
北도 中·러와 삼각축 복원 움직임
친러 돈바스 지역 복구 등 협력 추진
한국 압박 우려 속 면밀 대처 필요

동북아와 한반도에 30여년 만에 새로운 형태의 판짜기가 진행되고 있다. 30여년 전 판짜기의 핵심 동인은 한국이 추진한 소련, 중국과의 수교였다. 반면 이번의 판짜기는 훨씬 더 복잡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30여년 전 한국은 냉전 종식의 흐름이 촉발한 구조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동북아 지역 판짜기의 공세적인 ‘변화 촉진자’였다. 하지만 현재는 수세적인 ‘변화 대응자’라는 느낌을 준다. 반면 북한이 적극적인 나름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 30여년 전의 판짜기 흐름과 다른 점이다.

김석환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국제정치학

새로운 판짜기의 물결은 인도태평양 영역과 유라시아 영역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인도태평양 영역에서의 흐름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유라시아 영역에서의 판짜기는 크게는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도 핵 능력을 확보한 후 자신들의 전략적 지향점을 분명히 하면서 새로운 판짜기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분명해지고 있는 러시아와 북한 간 유착,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 공화국과 북한의 협력 움직임, 북한이 추진하는 ‘북한-중국-러시아’ 축의 강력한 복원 움직임은 이런 점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판짜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변화 움직임이다.

북한은 2014년 크름반도 병합 당시 러시아를 지지했다. 또 2022년 2월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에도 러시아를 지지했다. 지난 7월엔 우크라이나 내 친러 분리 독립 세력인 돈바스 지역 공화국들(도네츠크 및 루한스크)과 수교했다. 최근엔 이들과 전후 복구사업에서의 협력, 인력 송출, 무역 및 산업 협력 등을 놓고 협의 중이거나 그 가능성이 크다는 소식들도 나온다.

소련 시절 북한의 마그네사이트가 우크라이나 철강 및 금속 산업을 위해 수출됐었고 우크라이나산 밀과 북한산 상품은 사회주의 바터무역과 루블 경제권의 한 부분으로 작동한 바 있다. 경제제재 국면 속에서 북한과 돈바스 지역 간에 형성됐던 산업 밸류체인이 30여년 만에 복원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북한이 우크라이나를 버리고 친러 행보를 노골화하면서 이 시점에서 노리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크게 볼 때 북한의 최근 행보는 인도태평양 지역 내 민주주의 진영의 결속 움직임에 대한 권위주의 세력의 반발 및 대응 움직임의 한 형태다. 이를 통해 북·중·러 축의 연대를 공고히 하자는 것이다.

또 경제산업적 측면에서는 북한의 산업경제가 그동안의 제재 국면에서의 침체를 떨쳐내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돈바스 지역의 크라마토르스크 중기(重機) 공장이나 슬라뱐스크 정밀기계 공장 등에서 생산된 각종 산업 설비 및 정밀 선반 기계 등이 북한의 중요 산업체에 공급됐던 것을 상기하면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은 최근 “북·러 관계의 새로운 전략적 높이에로의 강화 발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의미하는 ‘새로운 전략적 높이’는 무엇을 지향하는 것일까?

최근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북한은 북·러 관계 긴밀화를 활용해 ‘북한-러시아-중국’으로 이어지는 ‘구조의 축’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지난 30여년 동안 한·러 관계에 뒤떨어졌던 북·러 관계를 한·러 관계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개선하고, 북·중·러 연대 강화, 이란·몽골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포함한 새로운 ‘친북 경제안보 협력공간’ 창출을 꿈꾸는 것일 수도 있다.

러시아는 현재 외교안보적 지원이 경제산업적 지원보다 더 절실한 상황이다. 북한은 러시아산 무기체계에 통합되어 있고 북한의 무기, 미사일 제품 등은 북한의 주요 수출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다양한 협력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북·러 협력이 본격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 지난 30여년 동안 형성됐던 한·러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비우호국 관계로 전락한 상황에서 북·러 간 실질적 협력의 수준이 외교안보를 중심으로 한국을 압도할 가능성도 있어 면밀한 대처가 필요하다.


김석환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