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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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미칼럼] ‘보이지 않는 국민’을 위한 정부

“약자복지 추구” 공염불돼선 안 돼
정책 소외·사각지대 관심 쏟아야

극심한 가뭄이 이어진 유럽과 미국의 강, 호수에서는 오랫동안 잊혀진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페인에서는 ‘과달페랄의 고인돌’로 불리는 거석들이, 다뉴브강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기를 실은 채 침몰한 독일 군함들이, 유럽 산악 지역과 미 서부 호수에서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유골들이 발견됐다. 자연재해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묻혀 있었을 ‘사연’이 어디 이뿐인가.

한반도를 불안에 떨게 했던 태풍 ‘힌남노’나 지난달 기습 폭우 같은 재해가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공동체의 취약함을 맞닥뜨리게 된다. 재해는 공평하게 불어닥치지만 생명과 삶의 터전을 크게 위협받는 쪽은 사회 약자들이다. 반지하 주거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맞이한 가족의 사연은 여전히 반지하를 떠나지 못하는 수십만명의 존재를 드러냈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끝내 죽음을 택한 수원 세모녀 사건은 8년 전 송파 세모녀 사건에도 복지 사각지대를 메꾸지 못한 사회적 재해나 마찬가지다.

황정미 편집인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복지가 아니라 약자복지를 추구하겠다”고 했다. 표가 되고 목소리가 큰 집단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는 약자에게 지원을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반짝 관심이 아니길 바란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17일 취임 100일 회견에서 “국민의 숨소리 하나 놓치지 않겠다”고 했다. 대통령은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지만 모든 국민 숨소리를 구별 없이 놓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국민이 우선이냐고 따진다면 ‘보이지 않는 국민’들이어야 한다.

지금 여의도 정치를 뒤흔드는 이들은 확성기를 쥔 자들이다. 정치적 팬덤이 정당사에 시시콜콜 관여하는 일상 세력이 됐다. 소위 ‘윤핵관’과 대척점에 선 이준석은 20∼30대 남성 지지에 기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개딸’과 같은 팬덤을 방패막이로 활용한다. 팬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정치인을 확성기 삼아 목소리를 키우고 존재감을 과시한다. 팬덤 정치가 유독(有毒)한 것은 ‘부정적 당파성’(에즈라 클라인,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에 뿌리를 둔 탓이다. 상대에 대한 부정적 감정, 혐오가 그들을 뭉치게 하는 동력이다.

민주당 우상호 비대위체제에서 출범한 ‘새로고침위원회’는 최근 두 달간 논의한 당 비전 보고서를 내놓았다. 결론은 새로운 지지층 확장 없이 선거 승리는 힘들다는 것이다. 위원회에서 활동한 이관후 박사는 ‘피렌체의 식탁’ 칼럼에서 “전통적인 진보, 보수 구도는 깨졌다”고 썼다. 3000명 대상으로 정책 가치 지향을 조사한 결과 유권자들은 평등·평화, 자유·능력주의, 민생우선, 개혁우선 등 6개 그룹으로 분화돼 있으며 소득, 이념 같은 잣대로 보수 또는 진보로 분류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니 “저학력·저소득층에 국민의힘 지지자가 많은 건 언론 책임이 크다”는 이 대표 주장은 번지수가 틀렸다. 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건 민주당 정책의 실패일 뿐이다. 검찰개혁처럼 배타적 개혁만을 외치는 목소리 큰 집단에 갇힌 결과다.

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취약하다. 당 안팎으로 뚜렷한 지지 세력이 없다. 지지율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자는 물론 전통 보수세가 강한 영남지역, 장·노년층에서도 부정 여론이 적잖은 이유다. 그는 입버릇처럼 “나는 정치인들에게 빚진 게 없다”고 했다. 민주당 이재명체제처럼 목소리 큰 전통 지지층, 정치 팬덤에 휘둘릴 일은 적을 테니 ‘보이지 않는 국민’들을 끌어안는 데 더 과감해야 한다. 노동 기득권 그룹 민노총에 밀리는 비정규직 노동자, 미래가 불안한 자영업자, 청년세대, 소외된 지방, 빈곤층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

며칠 후면 한가위다. 정치인들의 ‘전쟁’을 보노라면 추석 밥상에 쏟아질 한숨이 느껴진다. “첫째도 국민, 둘째도 국민”이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변화는 일정표가 말해준다. 어떤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지, 어떤 곳을 자주 찾는지. 보이지 않는 국민들 목소리를 크게 듣는 자리가 많았으면 한다. 그게 청와대를 떠나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긴 이유 아닌가.


황정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