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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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창칼럼] 노인연령 기준 상향의 조건

1981년 만든 65세, 시대에 안 맞아
고령사회에 맞게 단계적 상향해야
지금이 골든타임, 더 미뤄선 안 돼
오래 일할 수 있는 여건조성이 관건

“경험은 나이 들지 않아요. 경험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죠.” 영화 ‘인턴’(2015년)에 나오는 명대사다. 창업 1년 반 만에 직원 220명을 둘 만큼 성공한 30세 여성 CEO 줄스(앤 해서웨이 분)가 40년 직장생활과 풍부한 인생경험을 한 70세의 벤(로버트 드 니로 분)을 시니어 인턴으로 채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능하지만 정서가 불안정한 줄스 옆에서 벤은 고비마다 지혜를 줘 실패를 막아준다.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영화라 찾는 팬들이 많다.

‘젊은 노인’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요즘 65세 이하는 노인 축에도 못 낀다. 외모도 장년층 정도로 보이고 경제활동 능력도 충분한 사람이 많아서다. 보건복지부가 65세 이상 1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서 응답자들은 ‘노년이 시작되는 연령’을 평균 70.5세라고 답했다. 변호사와 목사의 육체노동이 70세까지 인정되는 등 법원 판결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70세는 넘어야 노인 대접을 받는 시대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기초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등 대부분 복지 사업은 65세가 기준이다. 1981년 노인복지법 제정 때 정해져 40년 넘게 그대로다. 당시 한국인 평균수명은 66.1세였고 노인인구는 149만명이었다. 올해는 각각 83.5세와 901만명으로 평균수명은 17.4세 길어지고 노인인구는 6배나 늘었다. 의학기술 발달로 2070년엔 기대수명이 91세까지 올라간다. 현실과 동떨어진 노인 기준을 손봐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10년에 한 살씩 노인연령 기준을 올리자고 제안해 주목받고 있다. 노인연령을 2025년부터 10년에 1세씩 상향해 2100년 기준 73세로 높이면 노인부양률(생산연령인구 대비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현재(96%)보다 훨씬 낮은 60%로 떨어진다. 국가는 복지 비용을 줄이고 노인은 노동 시장에서 계속 일할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2070년에 생산연령인구(15~64세)는 2020년 3737만명에서 1736만명으로 줄지만 노인인구는 815만명(2020년)에서 1747만명으로 늘어난다. 이대로라면 연금, 국가 재정이 위기에 처할 것이 뻔하다.

주요 선진국은 고령화를 반영해 앞다퉈 노인연령 기준을 올리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권고사항이긴 하지만 70세 정년 시대를 열었다. 일본 노년학회는 한술 더 떠 고령자 정의를 75세 이상으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독일은 2012∼2033년에 걸쳐 노인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높이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은 2020년 노인연령을 65세에서 66세로 조정한 데 이어 2026년에 67세로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우리나라도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날려 버렸다. 2015년 대한노인회가 노인연령 기준을 단계적으로 70세로 올리자는 제안을 했다. 지하철 무료이용, 기초연금 등 혜택을 받는 기간을 뒤로 미뤄 국가부담을 덜고 미래세대와 상생하겠다는 대승적 결단이었다. 하지만 박근혜정부는 물론 문재인정부도 반대 목소리와 노인 표를 의식해 주저하다 공론화 기회를 놓쳤다. 이게 우리 정치권의 수준이다.

노인들이 한 직장에서 최대한 오래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게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정년연장 논의와 함께 시니어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노인 대부분이 경비, 택배 등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현실을 개선해 경륜과 전문지식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것이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년들의 일자리와 충돌을 피하려면 경직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개혁도 해야 한다.

윤석열정부는 ‘고령자 계속고용을 위한 사회적 논의’를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연금개혁에 착수한 정권 초반이 노인연령 조정의 골든타임이다. 생산연령인구 기준도 올리는 등 분야별 검토를 통해 정교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저출산고령화 국가에서 젊은 노인들을 생산인구로 활용하는 건 국가와 개인 모두를 위한 일이다. 벤과 줄스 같은 상생 관계를 현실에서도 많이 보고 싶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