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킹달러에… “백화점보다 비싼데 누가 면세점서 사나요” [밀착취재]

가격 역전현상에 ‘텅 빈 면세점’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환율에
향수·립스틱 등 명품 브랜드
국내 일반매장보다 값 더 줘야
2022년 7월 매출액 한 달 새 15%↓

“이럴 거면 한국 가서 사는 게 낫겠네요.”

지난 16일(현지시간) 뉴욕 JFK(존에프케네디) 공항에서 만난 30대 여행객 A씨는 손에 들고 있던 립스틱을 내려놓으며 이같이 말했다. 그가 사려고 했던 명품 브랜드의 립스틱은 면세가로 35달러였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1달러에 1388원으로 마감했기 때문에 4만8000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지만 한국 사이트에서는 이 제품이 4만7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A씨는 “여행 갔다 돌아오는 길에 면세점에 들러 가족들 선물도 사고, 직장 선배, 동료들 선물도 사려고 했지만 외국에서 무엇을 사는 게 오히려 손해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인천공항의 면세점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달 초 인천공항 2터미널에 있는 명품 브랜드 면세매장에는 고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출국하기 전 쇼핑을 하려고 일찍 공항을 찾았다는 김모(29)씨는 “백화점과 비교해서 싸지도 않고, 물건도 많이 없어서 살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푸념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으로 해외 여행객이 감소한 데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3년 5개월 만에 최고치로 치솟으면서 공항 면세점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면세점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고 일부 상품은 백화점보다 비싸지는 ‘가격 역전 현상’까지 벌어지면서 면세점을 찾는 발길이 급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상품의 면세가가 국내 판매가보다 높아진 것으로 확인된다. 19일 기준 한 명품 브랜드의 면세점 향수 가격은 78달러로 10만8646원이지만 국내 판매액은 10만7000원이다. 해외 유명 피부관리 제품도 면세가로 6만6700원 수준이지만 국내 판매가는 6만6000원이다.

최근에는 면세점의 가격 경쟁력이 크지 않다 보니 꼭 필요한 물건만 인터넷으로 가격을 검색한 뒤 구입하고 출국 전 면세품 인도장에서 찾아가는 사람이 많다.

직장인 이모(24)씨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3시간 전 공항에 도착해 여유 있게 면세점 쇼핑을 했지만 지금은 출국 당일 면세품 인도장에서 물품만 찾는 정도”라며 “공항 면세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지출 계획에 없던 물품들도 사게 되는데, 인터넷 면세점 사이트에서 필요한 물품만 사면 불필요한 지출을 안 하게 된다”고 말했다.

20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스크린에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4.1원 내린 1,389.5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연합뉴스

이 같은 고환율 영향으로 국내 면세점 매출은 급감하고 있다. 20일 한국면세점협회에 따르면 지난 7월 국내 면세점 매출은 전월 대비 14.64% 감소한 1조2474억4863만원으로 집계됐다. 6개월 만에 최저치다. 해당 기간 내국인 매출액은 1299억원에서 1306억원으로 다소 증가했으나 외국인 매출액은 1조3315억원에서 1조1167억원으로 크게 떨어졌다. 환율이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매출 감소가 이어지자 국내 면세점들은 환율 보상 및 적립금 혜택 등의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다. 롯데면세점의 경우 내국인 고객들을 위해 지난 4월부터 매장 기준 환율 및 구매금액에 따라 면세점에서 현금처럼 사용 가능한 ‘LDF PAY’(엘디에프 페이)를 증정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또 원·달러 환율이 1450원을 넘어갈 경우, 차액을 일부 보상해주는 프로모션을 신설했다. 신라면세점 서울점은 이달 말까지 구매금액에 따라 최대 318만원 상당의 적립금을 지급한다.

정부는 여행자 편의 제고와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면세 한도를 600달러에서 800달러로 상향했다. 또 주류 면세 한도도 400달러 이하 1병(1L)에서 총 2L 이내 2병으로 확대했다.

면세업계는 매출을 회복하려면 환율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여행 수요가 살아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 면세업계 관계자는 “정가로 비교하면 백화점보다 비싸 보이지만 할인 혜택 등을 감안하면 그래도 면세점에서 사는 게 메리트가 있다”며 “환율이야 프로모션 등을 통해 극복할 수 있지만 매출이 회복되려면 여행 수요가 살아나야 한다. 아직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 비해 국제선 항공편 회복세가 더뎌 사업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글·사진=구현모 기자 lil@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