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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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떠났지만, 사랑이 찾아오는 남원 서도역 낭만 여행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폐역 서도역 들어서자 시간이 멈춘듯 옛모습 그대로/봄엔 벚꽃···가을엔 메타세쿼이아길 사랑이 익어가네/최명희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이자 작가의 고향/수목원 카페 아담원엔 불타는 홍단풍 가을정취 물씬/사랑이뤄지는 광한루원 오작교도 거닐어볼까
서도역 전경.

매일 전주로 통학하던 오라비. 이른 아침마다 행여 기차 시간에 늦을까, 어미가 차린 아침밥 먹는 둥 마는 둥 한술 뜨고 책가방 옆에 끼고 간이역으로 달려갔지. 서울 가서 돈 많이 벌어 오겠다던 아부지가 “왜 이렇게 기차가 늦냐”며 배웅 나선 가족들 앞에서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우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어떤 이에게는 낯선 세상으로 떠나기 위해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던 문이던 시골 간이역. 기차는 떠난 지 오래다. 아니, 이제 영영 오지 않는다. 폐역 서도역 녹슨 선로에는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시간만 아련하다.

서도역 입구 전경.
서도역 간판.

◆기차는 떠나고 사랑이 찾아오네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역으로 들어서자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 그대로다. 세월이 묻어나는 빛바랜 역사 건물을 통과해 승강장으로 나서자 수령 50년은 너끈하게 넘은 듯, 성인 남자 몸통 두 배 굵기의 우람한 벚나무들이 선로를 따라 끊임없이 늘어섰다. 4월 초쯤 벚꽃 필 때 오면 연인들 얼굴이 온통 핑크로 물들 정도로 예쁠 것 같다. 마을 아이들에겐 소꿉장난하던 놀이터였겠지. 하루에 몇 차례만 서는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역무원과 숨바꼭질하는 풍경이 그려진다.

서도역 역사 내부.
숙직실.

 

서도역 '혼불' 내용 조형물.

서도역(書道驛). 낡은 간판에 걸린 역 한자 이름이 아주 특이하다. 방향을 뜻하는 ‘서(西)’가 아니라 ‘글 서(書)’자이니 말이다. “참 신기하죠. 이 마을에 유명한 작가와 작품이 탄생할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것 같네요.” 동행한 관광택시 기사가 얘기한 작가는 최명희(1947∼1998년)로 유명한 대하소설 ‘혼불’의 작가. 그는 소설에서 수백 년을 이어왔지만 무너져 가는 남원 매안 이씨 종가 며느리 3대의 가족사를 통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집필에 무려 17년이나 걸렸다. 소설의 무대인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상신마을과 서도리 노봉마을은 작가의 고향으로 소설 주인공 청암부인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또 소설 속 효원이 대실에서 매안으로 시집오면서 내린 기차역이 바로 서도역이다. 주인공 강모도 서도역에서 전주로 통학한다.

서도역 이정표.

 

서도역 벚나무길.

역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932년. 작가가 태어나기 15년 전이니 관광택시 기사의 너스레가 왠지 거짓부렁만은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서도역은 2002년 전라선 철도 이설로 인근에 새 역사가 지어지면서 폐역이 됐다. 지금은 영상촬영장으로 쓰이며 옛 추억을 되새길 뿐이다. 서도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역사로 한때 사라질 뻔했지만 마을 사람들과 남원시가 힘을 합쳐 역사와 부지를 매입하면서 지켜냈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서도역 철길.

평일이라 한산하던 서도역은 점심때가 지나잖아 약속이라도 한 듯 연인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낡은 역사를 배경으로 선로 앞 벤치에 앉은 연인은 흐린 날씨 덕분에 영화에 등장하는 빛바랜 사진 속 주인공들 같다. 맑은 날보다 더 예스러운 사진을 얻을 수 있으니 날이 흐려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면서 연인들이 사랑의 추억을 남기는 명소가 됐다. 드라마 8회에서 구동매(유연석 역)가 철길에 앉아 한성으로 가려는 고애신(김태리)을 기다리던 장면이 서도역이다.

서도역 메타세쿼이아길.

 

메타세쿼이아길 포토존.

연인들이 철길을 따라 걷는다. 철길 곳곳에 나무 의자가 놓인 포토존이 마련됐고 끝까지 가면 등나무터널을 만난다. 연인들은 어둠 속에 섰지만 그들 앞으로 이어진 터널 밖은 영원히 계속될 사랑처럼 밝은 빛으로 찬란하다. 역광으로 예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만나는 메타세쿼이아길이 서도역 최고의 뷰포인트. 두 갈래로 나뉘는 철길과 신호등, 터널을 이룬 메타세쿼이아길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연인들의 뒷모습은 빈티지스러운 낭만적 풍경이다.

등나무터널.

 

역사방면 메타세쿼이아길.

소설 ‘혼불’의 배경지인 근처 노봉마을에는 최명희 작가의 집필실을 재현한 혼불문학관도 있어 함께 여행하기 좋다. 혼례식, 강모와 강실의 소꿉놀이, 액막이 연날리기, 청암부인 장례식, 춘복이 달맞이 장면 등 소설 속 장면이 디오라마로 전시돼 옛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또 종가, 청호저수지, 달맞이공원, 노적봉 등 소설 속 실제 공간도 만난다.

아담원 죽연지 홍단풍.

 

아담원 잔디광장.

◆불타는 홍단풍 즐기러 수목원 카페 갑니다

 

서도역을 떠난 관광택시는 남쪽으로 차를 몰아 30분을 달린다. 요즘 연인들에게 인기 높은 수목원 카페 아담원 안으로 들어서자 통창을 통해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마치 자연을 그대로 담은 수채화 같다. 밖으로 나서면 마사길, 아담길, 소나무숲길 등 산책로가 이어져 가을바람을 즐기며 천천히 걷기 좋은 곳이다. 카페 건물 바로 앞의 죽연지 나무테크에는 자매가 앉아 도란도란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흐리던 날이 개고 높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자 죽연지를 꾸민 홍단풍은 더욱 선명하고 붉어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긴다. 아담원은 나무를 키우던 조경농원으로 2018년 수목원 카페로 문을 열었으며 풍광이 빼어나 가볍게 나들이하기 좋다. 하지만 입장료 1만원은 볼거리에 비해 다소 비싼 느낌이다. 더구나 오픈 초기에는 입장료에 음료값이 포함돼 있었는데 지금은 음료값을 추가로 내야 하기에 좀 부담스럽다.

지리산 허브밸리 대온실 커플 조형물.

 

지리산허브밸리 대온실.
지리산허브밸리 대온실.

이에 비해 지리산허브밸리는 입장권도 성인 4000원으로 저렴하고 오밀조밀 예쁜 풍광이 많아 연인들이 부담 없이 가을 풍경을 만끽하기 좋은 허브테마파크다. 아담원에 차로 20분 거리로 남원시민은 무료다. 매표소를 지나자 대온실 앞에 키다리 연인 조형물이 여행자를 반긴다. 남자는 등 뒤로 꽃다발을 숨기고 있고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대온실로 들어서니 사계절 피는 아름다운 꽃과 다양한 식물이 가득하고 로즈메리 등 허브들이 펼쳐져 비강을 향긋하게 채운다.

지리산 허브밸리 산수국길.
지리산 허브밸리 오헤브 정원.

아로마숍이 마련된 2층 허브토피아관을 거쳐 밖으로 나서면 예쁜 연못을 품은 허브밸리의 메인, 오헤브 정원이 펼쳐진다. 오헤브(oheve)는 ‘사랑하다’는 뜻의 희랍어. 정원에는 수줍은 서양봉숭아 산파첸스가 알록달록 펼쳐졌고 서로 마주 보면 간지러운 언어를 속삭이는 연인들 얼굴에선 허브처럼 향긋한 사랑이 피어난다. 수국길, 몽환정원, 동화마을, 스카이트레일, 조각공원으로 다양하게 꾸며져 가족 나들이하기도 좋아 보인다.

광한루원 완월정 야경.

 

광한루원 옥지환 조형물.

◆오작교 거닐며 즐기는 광한루원 야경

 

남원에 왔으니 춘향과 몽룡이 노닐던 광한루원과 남원 추어탕을 빼놓을 수 없다. 관광택시로 남원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떨어지지 시작해 광한루원으로 달려간다. 정문 매표소로 들어서자 넓은 잔디에 둥근 달이 둥실 떴고 그 뒤로 화려한 조명이 완월정을 비춘다. 조명으로 가득한 달과 고풍스러운 완월정을 함께 담아 예쁜 야경을 찍는 곳이다. 완월정을 지나 오작교를 건너면 영주각, 방장정, 춘향사당, 광한루 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이 이뤄지는 오작교를 건너는 연인들에게도 화려한 조명이 비쳐 드라마 속 풍경을 연출한다. 정유재란도 견딘 유서 깊은 돌다리다.

오작교.

 

오작교.

안쪽에 자리 잡은 광한루는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으로 묵객들은 예로부터 광한루를 으뜸으로 꼽았다. 1419년에 지은 광한루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지만 1626년에 복원해 4대 누각 중 복원 역사도 가장 오래됐다.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광한루로 춘향과 몽룡이 어디선가 걸어 나올 듯 고풍스러운 매력이 넘친다.

추어튀김.

 

추어탕.

남원 여행의 마침표는 여행하느라 떨어진 기력 보충이다. 남원이지만 요천로 남원추어탕거리에서 만나는 ‘부산집’에 들어섰다. 얼마 전 ‘식객’ 허영만 화백이 다녀간 뒤 맛집으로 소문나면서 제법 대기하는 줄이 길다. 바싹한 식감이 돋보이는 미꾸리튀김 한입 베어 물자 식욕이 왕성하게 돌아온다. 입에서 살살 녹는 시래기와 부추를 넉넉하게 얹은 추어탕은 잡내 하나 없이 구수하다. 진한 국물 한입 떠 넣자 여행의 피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관광택시는 남원을 아주 편안하게 여행하는 지름길. 4시간 기본요금 8만원에 1시간당 2만원이 추가된다. 6시간 정도 이용하면 10만원이지만 남원시에서 3만원을 지원하니 실제는 7만원. 4명이 함께 여행한다면 착한 비용으로 알뜰하게 남원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남원=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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