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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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위기인데 남녀가 어디 있나" 외친 진정한 영웅들

6·25 때 여성 학도의용군 조명하는 세미나 열려
군번도, 계급도 없다 보니 연구·지원 모두 부족
"정부 차원 조사 필요… 포로에도 관심 가져야"

“장교 두 명이 학교에 와 ‘정훈부대에서 일할 지원자를 뽑는다’고 했어요. 많은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모두가 나라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죠. 저를 포함해 노래 잘하고 글 잘 쓰는 학생 4명이 선발됐습니다.”

6·25전쟁 당시 여성의용군 대원들이 거수경례를 하는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17살 고교생이던 정기숙(89)씨의 회고다. 춘천여고에 다니던 그는 여성 학도의용군이 돼 정훈 요원으로 전장을 누볐다. 몇 해 전 언론 인터뷰에서 그 시절 겪은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하며 “젊은이들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갖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우리 군은 6·25전쟁 당시 여성 2400여명이 참전한 것으로 파악한다. 현역 군인으로 활동한 이는 1751명이고 정씨처럼 군번도, 계급도 없는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여성도 600여명에 이른다.

 

북한이탈주민 인권 증진과 생환 6·25 국군포로 지원 등 사업을 펴는 사단법인 물망초는 2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6·25와 여성 학도병의 역할’이란 주제로 제77차 물망초 인권세미나를 열었다. 마침 이날(9월28일)은 6·25전쟁 당시의 서울 수복 72주년 기념일이어서 행사의 의미가 더욱 뜻깊게 다가왔다.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의 개회사, 물망초 인권연구소장 이재원 변호사의 인사말에 이어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수한 울산대 교수를 좌장으로 주제발표 및 토론이 뒤따랐다.

 

육군사관학교 나종남 교수(대령)는 주제발표에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발벗고 나섰던 학도의용군에 대한 우리 사회와 학계의 관심이 크지 않다”며 “수많은 학도의용군 참전자가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외쳐왔으나, 우리 사회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싸웠다’는 점에 있다. 공식 기록이 부족하니 관련 연구도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여자 학도의용군도 마찬가지였다. 나 교수는 “여자 학도의용군의 경우 현역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으며, 군번 없이 전후방의 각 전투부대에서 행정업무 지원과 병원에서 간호 및 선무 활동에 참여하였다”고 소개한 뒤 “현실적으로 국방의 의무가 없었음에도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구국 일념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 참전하여 활약한 영웅들”로 규정했다.

6·25전쟁 당시 여성 학도병들이 제식훈련을 받는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그는 “70여년이 지났지만 6·25전쟁 시 활약했던 학도의용군에 대한 체계적인 자료 정리, 종합적인 연구와 분석, 그리고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충분히 기릴 수 있는 원호 및 보훈 정책에 대한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는 것으로 발표를 마쳤다.

 

이어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신희석 법률분석관이 토론자로 나서 여성 학도의용군의 현황과 법적 지위, 향후 과제 등을 짚었다. 신 분석관은 병역법을 비롯한 국방 관련 법령, 또 보훈 관련 법령 어디에도 ‘여성 학도병’의 지위를 별도로 규정한 조문이 없다는 점을 꼬집으며 “여성 학도병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 연구 및 명예회복, 역사교육 등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학도병 중에는 전란 도중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후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북한에 억류된 이들이 있다. 지난 2007년 국가정보원은 미송환 국군포로 숫자를 1770명으로 추정하며 사망한 910명, 행방불명된 300명을 제외한 560명이 생존해 있다고 파악했다. 그 사이 15년이 지난 만큼 생존자 수는 더욱 줄었을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신 분석관은 “가칭 ‘6·25전쟁 국군포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를 설치하여 여성 학도의용군 출신을 포함한 6·25 전쟁포로 및 실종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