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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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산의마음을여는시] 도둑의 딸

입력 : 2022-10-03 22:55:49
수정 : 2022-10-03 22: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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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

배고픔을 웅크려 안았는데요

 

시동 걸리는 소리, 차 밑을 빠져나오는데요

 

예쁜데, 내 야옹이 할래?

 

그 제안을 덥석 물었지요

 

밥 냄새를 맡으면

 

부엌에서 얌전히 물러서 꼬리를 내리지요

 

포만감에 기대

 

흰 털에 햇빛 한 올씩 엮어 잠을 짜지요

 

오, 창문이 열린 날

 

몸을 밖으로 쑥 밀어내고 먼 자유를 보아요

 

내 안 위대한 도둑의 딸이 꿈틀거려요

 

담장과 벽은 단단해요

 

초록에 숨긴 초록 감들은 가을이면 제 노랑 존재를 보이는데요

 

경계에 서 있는 위태함

 

눈 가득 슬픔이 고여 와요

 

먹먹해요, 야옹

요즘 길고양이가 많습니다.

 

길고양이가 많은 만큼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캣맘도 많아졌고요.

 

야생 고양이인 나는 늘 배고픔을 안고 살았는데

 

어느 날 캣맘인 지금의 주인을 만나 길고양이를 면했습니다.

 

따뜻한 밥과 편안한 침대,

 

그리고 사랑을 흠뻑 받으며 안락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초록에 숨긴 초록 감들이 가을이 되어 제 노랑 존재를 보이듯이

 

집고양이가 된 나는 길고양이의 본성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됩니다.

 

담장 밖으로 몸을 쑥 밀어내고 먼 자유를 봅니다.

 

내 안 위대한 도둑의 딸이 꿈틀거립니다.

 

자유와 안락함의 경계에 서 있는 나는

 

눈 가득 슬픔이 고여 옵니다. 먹먹해요,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