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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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비비정 올라 만경강 낙조 즐겨볼까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호남평야 젖줄 따라 걷는 ‘완주 만경강길’ 가을 풍경 완연/발원지 ‘밤샘’ 가는 길 동상편백나무숲 거닐며 ‘힐링’/세심정서 마음 씻고 비비정에 올라 환상적인 만경강 낙조 즐겨

비비정 만경강 낙조.

끼룩끼룩. 찬바람 들기 무섭게 쇠기러기 한 무리 요란하게 울며 창공을 날아오더니 강가 모래사장에 멋지게 착륙한다. 어느새 핀 갈대와 억새를 금빛으로 비추던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서서히 떨어지는 낙조의 시간, 완주 8경 비비정에 앉았다. 쇠기러기 날아드는 습지와 강물을 빨갛게 물들이며 미끄러져 들어가는 저녁노을이라니. 오래오래 가슴에 간직하고 싶은 님의 가을 편지를 닮았다.

밤샘 가는 길.

◆기러기 날아드는 만경강 따라 가을 오시네

 

만경강은 호남평야의 젖줄이다. 전북 완주군 동상면 밤샘에서 발원해 전주, 익산, 김제, 군산을 거쳐 서해로 흘러든다. 약 80㎞의 강줄기는 과거 농업 생산물을 운반하는 중요한 뱃길로 지나는 길목마다 평야가 펼쳐져 가을 들판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쇠기러기와 노랑부리저어새 등 철새들에게는 겨울을 나는 안식처. 이런 풍요로운 강을 따라가는 길이 ‘완주 만경강길’로 밤샘에서 삼례읍 해전마을까지 7개 코스 44㎞가량 이어진다.

만경강 발원샘 밤샘.
동상편백나무숲.

밤티마을과 밤샘을 잇는 1코스 밤샘길(왕복 4.6㎞)을 걷는다. 한낮에도 태양을 가릴 정도로 울창한 숲에는 밤나무가 많아 밤티마을이란 이름을 얻었다. 밤샘 입구까지 승용차로 접근할 수 있고 입구에서 밤샘까지 1㎞ 정도는 걸어야 한다. 아주 작은 물줄기가 오랫동안 쌓인 낙엽을 잔잔하게 적시는 계곡을 따라가면 주변을 돌로 쌓은 조그만 밤샘이 등장한다. 이렇게 작은 샘이 흐르고 흘러 거대한 만경강을 이루다니 참 신기하다. 돌아내려 오는 길에는 이름 모를 가을 야생화들이 지루함을 덜어준다. 인근에 동상편백나무숲이 있어 함께 묶어 여행하기 좋다. 한 기업이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운영하는 연수원이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가 편백나무가 쏟아내는 특유의 향과 피톤치드 덕분에 걷는 것만으로 폐가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다.

용암상회.
용암상회 BTS돌다리.

밤샘에서 발원된 작은 물줄기는 동상저수지를 이루고 그 물길은 다시 대아저수지에 모인 뒤 고산천과 만나 본격적인 만경강을 이룬다. 2코스 굽잇길(8.3㎞)을 지나면 방탄소년단(BTS) 성지로 뜬 창포마을을 만난다. BTS가 평상에 앉아 화보를 촬영한 용암상회와 뒤쪽 ‘BTS 돌다리’가 이곳에 있다. 창포마을에서 출발해 3코스 창포길(5.9㎞)을 1시간40분 정도 끝까지 걸으면 고산천과 만경강이 만나는 세심정(洗心亭)에 도착한다. 의주 목사를 지낸 조선시대 문신 만죽 서익이 지은 정자.

세심정.
세심정 입구 느티나무 노거수.

그는 고산의 산수에 매료돼 인근에 1만그루의 대나무를 심어 호를 만죽으로 짓고 항상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을 담아 정자 이름을 지었다. 세심정에선 고산자연휴양림까지 10.3㎞에 달하는 생태문화탐방로도 조성돼 있다. 오늘 좋은 일이 있나 보다. 아주머니가 세심정에 맛난 음식들을 잔뜩 차려놓았다. 마을 잔치가 있는데 와서 좀 먹으라니 넉넉한 시골 인심이다. 세심정에 오르는 길 입구엔 20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킨다. 높이 25m, 둘레 4.2m 노거수로 울퉁불퉁 불거진 근육이 아주 든든해 보인다.

봉동 상장기공원 정자와 배롱나무.

◆비비정에 올라 만경강 낙조를 보다

4코스 세심정길(8.1㎞)은 세심정에서 봉동읍 상장기공원까지 이어진다. 공원 입구 정자 주변에는 자홍색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어 여행자를 맞는다. 제방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에는 느티나무와 벚나무 노거수들이 즐비하다. 장마철마다 큰 피해를 당하던 마을은 안녕을 기원하며 매년 10월10일 당산제와 하천 변 모래사장에서 큰 씨름판을 연다. 마을에 힘센 장사가 많다는 사실을 과시해 원귀가 함부로 덤비지 못하도록 했단다. 200년가량 이어진 씨름 축제 덕분에 마을에선 유명 씨름 선수가 많이 배출됐다.

봉동 상장기공원 산책로.

5코스 생강길(7.2㎞)을 지나면 6코스 신천습지길(5.5㎞)이 이어진다. 만경강과 소양천이 합류하는 회포대교에서 하리교까지 2.4㎞ 구간은 ‘만경강의 허파’로 불리는 신천습지. 두 하천이 만나면서 경사가 완만해지고 폭이 넓어져 유속이 급속히 떨어진다. 덕분에 자갈과 모래들이 퇴적돼 군데군데 하중도(河中島)를 만들어 놓았다. 갈대, 부들, 연꽃 등 식물 67종과 멸종위기인 황새, 삵, 노랑부리저어새와 검은물잠자리, 하루살이, 개개비, 물닭 등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 왜개연꽃군락, 노랑어리연꽃군락, 수염마름군락 등 29종의 군락도 형성돼 있는데 특히 멸종위기종인 가시연꽃 등도 만난다. 신천습지를 모두 둘러보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비비정.
옛 만경강 철교.
비비정예술열차.

6코스 마지막 여정은 삼례교와 비비정, 그리고 예술열차다. 만경강 8경 중 5경인 ‘비비낙안(飛飛落雁)’이 펼쳐지는 곳. 비비정에도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 운치 있는 정자를 더욱 예쁘게 꾸미고 있다. 정자에 오르니 옛 만경강 철교와 비비정예술열차 너머로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옛 선비들은 비비정에 올라 바로 앞 한내 백사장에 내려앉는 기러기떼를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단다. 날아가던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을 담아 비비낙안이라 부른다. 원래 ‘비비’는 송시열이 중국의 명장 장비와 악비에서 글자를 따 지은 이름이다. 조선 선조 때 무인 최영길이 비비정을 별장으로 지었고 그의 손자 최양이 송시열에게 정자의 현판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비정예술열차 만경강 낙조.
비비정예술열차 만경강 낙조.

옛 만경강 철교는 일제강점기 호남평야의 농산물을 반출하기 위해 세운 다리. 2011년 근처에 호남선 철교가 새로 놓이면서 폐철교가 됐는데 그 위에 비비정예술열차가 만들어져 여행자들이 발길이 이어진다. 새마을열차 네 량을 개조해 레스토랑, 카페, 수공예품점, 갤러리로 꾸몄다. 해 질 무렵 마지막 칸 카페 창가는 빈자리가 없다. 만경강과 신천습지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은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한다.


완주=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