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과 소방이 구조한 자살시도자 등 자살고위험군 중 자살예방기관(시·군·구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지속적인 관리를 받는 사람은 전체의 4.8%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과 소방이 초동대처 중 발견한 자살고위험자의 개인정보를 자살예방기관에 의무 제공하도록 법 개정까지 이뤄졌지만, 정부는 이들 중 대다수에게 제대로 된 자살예방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수준인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선 자살고위험군을 관리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방안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자살예방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난 8월4일부터 9월20일까지 48일간 전국 경찰과 소방이 자살예방기관에 연계한 자살고위험자(자살시도자, 자살시도자의 가족, 자살 유족)는 총 4874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자살예방법 개정안은 경찰과 소방이 자살시도자 등을 발견한 경우 당사자 동의 없이 자살예방기관에 이들의 개인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자살예방기관은 개인정보를 접수한 3일 이내에 전화, 문자 등의 방식으로 상담, 치료비 지원 등 자살예방서비스를 안내해야 한다. 자살고위험군에 대한 전문기관의 선제 조치로 자살률을 낮추겠다는 취지다. 다만 당사자가 서비스 이용을 거부하거나 3차례에 걸친 연락에 응답하지 않을 경우 개인정보를 즉시 파기한다.
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자살예방기관에 연계된 자살고위험자 중 이같이 자살예방조치를 거부하거나 연락이 두절된 사람은 64.3%(3135명)에 달한다. 서비스 이용 의사를 밝힌 사람은 27.8%(1335명)에 그치고, 이마저도 자살예방기관의 지속적인 관리를 받는 사람은 4.8%(235명)로 매우 적다. 법 개정 전보다 자살예방기관에 연계되는 자살시도자 등이 4배 이상 증가했지만, 3명 중 2명이 넘는 자살고위험자는 적절한 예방조치 없이 지역사회로 바로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자살고위험군의 자살사망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월등히 높다.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자살예방책 없인 자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까닭이다. 실제로 복지부가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과 함께 지난 2015년부터 7년간 발생한 자살사망자 중 801명을 분석한 결과, 35.8%가 자살 시도력이 있고, 30.5%는 가족의 자살로 인한 사망을 경험한 자살 유족인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분석한 자살 유족 952명 중 59.5%는 자살 생각이 있는 것으로 응답했다.
때문에 4.8%의 자살고위험군만 지속 관리 중인 현 제도의 미비점을 파악하고 보완책 마련에 조속히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의 한 자살예방기관 관계자는 “이 사람이 정말 자살고위험군인지 아니면 경찰에 죽고 싶다고 충동적으로 신고한 사람인지 등 배경을 모른 채 개인정보만 받다 보니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사례를 구분할 수 없어 아쉽다”며 “경찰과 소방이 자살시도자 등의 문제 상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제공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자살예방센터장을 역임한 백종우 경희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자살 시도자에게 문자만 보내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당사자들을 직접 방문해 설득해야 (자살예방서비스 이용) 동의율이 높아질 것”이라며 “지금 자살예방센터나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업무가 포화 상태라 이를 구현할 수 있을 만한 인력부터 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아직 시행 초기라 경찰이나 소방의 이해도가 낮은 등 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단계가 아니다”라며 “제도가 안착될 때까지는 조금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조명희 의원은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정도로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나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을 살피고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며 “자살을 예방하고 고위험군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면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