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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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에 개입한 정치, ‘금융’에 들이민 정치…안보와 경제의 ‘나비효과’ [역사 속 경제이야기]

역사속 경제이야기②
경제는 결국 사람의 심리를 통해 결정된다. 사람이 경제를 만들고, 사람이 경제를 무너뜨린다. 그렇기 때문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지금의 경제라 할지라도, 반복되는 과거 역사 속 사람의 행보를 되짚어보면 한층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역사 속 경제이야기>는 역사를 뒤흔든 경제사건과 그 사건의 주인공을 통해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경제 현상’의 통찰을 얻는 시리즈다.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에서 촉발된 채권시장 자금경색 상황을 타개하고자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했다. 사진은 24일 춘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의 모습.    연합뉴스

1518년(중종13년) 8월16일. 함경도 병마절도사(육군 지휘관) 정인겸은 조정에 한 장의 공문을 올렸다. “여진족 추장 ‘속고내’가 지금 변경에서 사냥중이라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중앙 정부가 여진족 추장의 사냥 때문에 긴급 회의까지 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진족 추장 속고내는 아버지 ‘매하’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에서 벼슬을 했다. 그렇다고 진짜 행정업무를 봤던건 아니다. 조선은 여진족 관리차원에서 벼슬을 주고 이것저것 선물도 안겨줬다. 일종의 변방 관리책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노목합’이라는 다른 여진족과 다투다 살해당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다. 조선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속고내는 아버지의 죽음이 조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부터 속고내는 조선 변방을 노략질하며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1512년(중종7년) 조선 조정은 속고내가 함경도 변방인 갑산지역을 약탈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다. 조선은 같이 관리하던 다른 여진족 추장 ‘망합’에게 속고내를 칠 것을 지시한다. 하지만 망합은 미적댔고 이를 틈타 속고내는 도망친다. 결국 조선으로서는 골칫거리를 계속 변방에 두게됐다. 

 

1518년의 보고는 그렇게 사라진 속고내라는 골칫거리가 조만간 변방을 다시 노략질 할 수도 있다는 예고로 여겨졌다. 특히 사냥을 한다는 의미는 일종의 군사훈련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다른 여진족에 끼칠 영향을 본다면 이 상황은 더 좌시할 수 없었다. 기록은 영의정 정광필이 “속고내 때문에 다른 추장들도 잇따라 배반하니 이 사람이 난의 원인”라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조정이 긴급회의를 열었던 건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회의에서 북방 경험이 풍부했던 영의정 정광필, 이조판서 이장곤, 병조판서 유담년 등은 논의 끝에 서울에서 바로 정예 특수부대를 보내 사로잡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곧바로 특수부대를 이끌 적임자로 무인 이지방이 뽑혔고 정광필은 이지방이 떠나기 전 국왕 중종이 만나 격려를 해달라고 건의해 승낙받았다. 중종도 특수부대 파견에 동의했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다음날 홍문관 부제학 조광조가 이지방의 파견소식을 듣고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될 일”이라며 반대의사를 표시한다. 중종 앞으로 나아간 조광조의 반대 논리는 정정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제왕(帝王)의 거동은 만전(萬全)해야 한다. 반드시 사리가 바른 뒤에 거행해야 한다”며 “속고내가 변경에서 지금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몰래 군사를 내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영의정 정광필은 조광조의 말이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현실에는 적용할 수 없는 논리라고 반대했다. “참으로 유자의 말이지만, 변방의 일에선 제왕의 도는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말에도 조광조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저들이 먼저 변경을 요란하게 하여 적이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우리가 옳으니 정정당당하게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낀 병조판서 유담년이 버럭 조광조에게 화를 냈다. 유담년은 중종에게 “‘밭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한다’고 했으니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중종은 이지방을 보내는 것을 전체 신하들의 논의에 부쳤고 결국 중단시켰다. 유담년 뿐 아니라 정광필과 이장곤 등 경험이 풍부하고 북방을 잘 아는 전문가들보다는 ‘서울’에서 세상을 보는 조광조 측 판단에 더 무게를 둔 것이다. 

 

사실 중종은 이 즈음 조광조와 왕실 전용 도교 의식 관청이던 ‘소격서’를 폐지하느냐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철저한 유학자인 조광조 일파는 소격서 폐지가 선이라고 봤지만, 왕실을 대표하는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중종의 중단 결정은 소격서 폐지를 둘러싼 갈등을 정치적으로 풀려는 제스쳐일 수도 있다. 아무튼 다음날 조광조 파벌의 신하들은 왕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성의로 움직이면 감동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1년 뒤인 1519년.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파당을 지어 뜻이 다른 자들을 배척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다. 바로 기묘사화다. 

 

실록 기록에서 속고내는 그 이후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그 이후에도 변경 일대를 약탈하고 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했을수도, 안했을 수도 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이때부터 60여년이 지난 1583년. 이 지역에서 대규모 여진족의 습격인 니탕개의 난이 일어났고 그 이후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해 후금과 청나라를 만들었다는 정도다. 결국 조선 조정은 여진족 관리에 실패했다. 

 

최근 금융시장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채권 시장 경색의 출발점은 정치인 출신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결정이었다. 강원도는 지난달 28일 레고랜드의 조성을 담당한 중도개발공사(GJC)를 법원에 회생신청했다. GJC의 대출금 2050억원 중 일부를 갚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여파로 특수목적회사(SPC) 아이원제일차가 ‘GJC에서 돈 받아낼 권리’를 바탕으로 발행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가 지난 5일 부도처리됐다.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21일 오후 강원 춘천시 강원도교육청 브리핑룸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강원중도개발공사(GJC)에 대한 강원도 보증 채무 상환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강원도교육청 제공

강원도는 이 ABCP에 대한 지급보증을 한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의 부도는 결국 강원도에 대한 신뢰상실을 의미했다. 김 지사가 ‘돈을 안 갚겠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여러차례 강조했지만, 시장의 인식은 달랐다. 해당 ABCP는 지자체 지급보증 등을 이유로 신용평가사들로부터 A1등급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평가가 무색해졌다. 

 

김 지사의 결정에 따른 나비효과는 곧바로 채권시장에 몰아닥쳤다. 가뜩이나 금리 인상으로 인해 국고채 금리가 4%를 넘고 회사채 금리와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던 형국에서 이 사건이 벌어졌다.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은 “유증기가 가득한데 거기에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당기고 라이터를 튀겼다”고 말했다. 

 

시장은 신용등급의 무용성을 자각했다. AAA등급의 채권이 팔리지 않았고, 금리를 몇 %를 더 얹어준다 해도 시장에서는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점증하던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의 위험성은 급작스럽게 치솟았다. 일부 건설사들의 흑자 도산설이 시중에 일었고, 증권사들도 위험에 처했다는 각종 설이 여의도를 돌아다녔다. 

 

결국, 주말인 23일 경제를 이끄는 정부 최고위 인사들이 급하게 모여 50조원 이상의 자금 투입을 결정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주전인 지난 12일 10월 금통위에서 ‘빅 스텝’(0.5%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하며 “물가 오름세를 꺾기 위해 물가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었다. 2주 전, 한은의 스탠스는 분명 ‘자금 공급을 줄이겠다’ 였었다. 그리고 24일.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는 김 지사를 향해 “나비의 날개가 태풍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모든 일을 신중하게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우회적으로 지적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강원도가) 저희하고 협의한 바 없는 걸로 안다. 기본적으로 불안 요소가 깔린 상황에서 불안을 가속하는 여러 상황이 발생한 것”이라며 “어떤 배경에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저는 정말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이 말에서 500년 전 병조판서 유담년의 말이 들린 건 필자 뿐일까.


이도형 기자 scop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