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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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가와 특별한 소통… 관람객 10만명 이끌어

서울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전

4월 출발한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전
한국 근현대 미술사 거장 작품 총출동
높은 관심 받으며 관람객 발길 줄이어

“김기창 ‘예수의 생애’ 모두 있어야 의미”
작품에 담긴 뒷이야기 ‘수집가의 문장’
궁금했던 ‘작품 뒷면’ 모습 촬영 공개
소소한 아이디어로 소통의 보폭 넓혀

‘저는 김기창 화백이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라고 생각합니다. 오케스트라로 비유하자면, 김기창은 지휘자와 같은 화가이죠. 긴 이야기 속에서 단 몇 개의 장면만을 뽑아내고, 그것으로 전체를 이야기할 수 있는 화가가 몇이나 있을까요. 1998년 IMF 시절, 이전 소장가가 경제적 어려움에 내놓은 ‘예수의 생애’ 30점 모두를 당시 빌딩 두 채 값을 주고 품에 안았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시리즈 전체를 사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대표적인 한국 근대 화가 김기창이 비단에 그린 수묵담채 작품 ‘예수의 생애’(1952∼1953) 연작 옆, 수집가가 관람객을 향해 써 놓은 글이 조그맣게 걸려 있다. 정성스레 띄운 편지 앞에 관람객들이 빽빽하게 모여들더니 꼼꼼하게 글을 읽어 내려간다. 최근 부쩍 커진, 미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소통에 대한 갈망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인스타그램 인증샷 남기기를 넘어, 글 앞에 한동안 멈춰 서 있는 관람객 태도가 유독 눈에 띄는 이 현장은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자락 아래 위치한 석파정 서울미술관의 ‘두려움일까 사랑일까’ 전시장이다.

 

전시 전경. 서울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서울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소장품을 선보이는 전시다. 소장품 중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을 골라 꾸려보니 자연스레 한국 근현대 미술사를 써온 거장들의 작품이 대거 나왔다. 전시품이 160점에 달한다.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일정으로 꾸린 전시가 흥행하며 관람객 발걸음이 줄어들 줄 모르자, 미술관 측은 전시품을 더 꺼내 추가하는 등 전시를 리뉴얼해 오는 13일까지로 연장했다. 지난달 말, 누적 관람객이 10만명을 넘어섰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 별장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한 석파정을 찾는 방문객도 한몫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입장 제한이 있기 전 다른 주요 기획전들도 7만∼8만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수치임은 분명하다.

 

어떻게 입소문을 탔을까. 이시연 큐레이터는 “코로나19로 억눌렸던 문화생활에 대한 아쉬움, 최근 근현대 미술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 소셜미디어상에서 확산한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 작품 뒷면은 어떤지 궁금해하는 일반 관람객들의 호기심에 부응하려고 작품 뒷면을 촬영해 함께 보여준 것, ‘수집가의 문장’ 코너를 만들어둔 것이 관객과 소통하는 각별한 포인트가 돼 더 널리 알려진 것 같다”고 말했다.

 

한묵의 작품 뒷면 사진이 작품 옆에 함께 걸린 모습. 서울미술관 제공

수집가의 문장들은 작품에 얽힌 생생하면도 친근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미술사학자도, 이론가도, 전시기획자도 아닌 수집가는 가령 ‘예수의 생애’를 두고 이렇게 말을 건다.

 

‘한국전쟁 중에 그려진 이 귀한 작품들이 2017년,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며 독일 역사박물관에 초청을 받아 기독교 미술사의 가장 주요한 작품으로 소개되며 전시됐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가 한국에서 토착화된 예수의 모습으로 다시 유럽인들에게 신앙적, 미적 감동을 선사한 순간이었죠.’

 

작품이 화가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후세에 전해지기까지, 수집가는 작품 위에 천천히 축적되며 오랜 시간 걸쳐 형성되는 역사에 직접 참여하는 당사자가 된다. 그런 수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관람객에게 이색적인 미술 안내서가 됐다.

 

이대원의 대작 ‘사과나무’(2000) 앞에서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자 관람객들이 모여든 모습. 김예진 기자

이 수집가는 서울미술관 설립자인 유니온약품 안병광 회장. 그는 회장이나 설립자란 직함을 내려놓고, 그저 각 작품에 애정과 사연을 담아 모으고 보관해온 수집가로서 말한다.

 

그는 김환기의 추상화 ‘아침의 메아리’(1965)를 보고 ‘새벽의 별빛과 아침의 소리가 공감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처음 본 순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큰 그릇이 떠올랐습니다’라고 소개하거나, 도상봉의 ‘정물’(1954)을 두고 ‘국민학교 시절 교과서 표지에 나온 작품이었습니다. 책에서 보며 감탄했던 작품을 실물로 직접 보니 참으로 신기했고, 꼭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지요’라고 말한다.

 

박수근의 연필 스케치 작품 ‘젖 먹이는 아내’(1958)를 두고는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보내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박수근 그림 속 어머니의 모습은 돌아가신 내 어머니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전시는 한국 근현대 거장들의 작품만으로도 볼거리가 풍성하다. 그러나 더 큰 미덕으로 다가오는 것은 수집가의 문장 코너를 두거나, 작품 뒷면을 공개한 아이디어에 스민 태도다. 호화로운 호텔 미술 전시장에 값비싼 세계적 작품을 들여와 전시하면서도 안내글이 턱없이 빈약하거나, 전시장 장식에만 수억원을 소비하는 전시가 등장하고 있는 최근 우리 미술계의 ‘외화내빈(外華內貧)’ 세태와 대비되기 때문이다. 관람객 입장에서 궁금한 점을 고민하기, 관람객과 다양한 소통 방식을 시도하기.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에 몰입하고, 작품을 둘러싼 우리가 서로 공감하게 하는 것이 전시를 여는 이유임을 일깨운다.

 

13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