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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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에 사서 70만원에 판다… 보물이 된 고물장난감 [심층기획-폐기물 7000t의 딜레마]

<2부> 나는 자원이다 - 2회 폐플라스틱의 ‘고급진’ 변신

환경단체 ‘트루’의 폐플라스틱 실험
분해·세척·파쇄 과정 거친 ‘플레이크’
열·압축 처리해 고부가 ‘판재’ 뚝딱
책상·의자·타일 등 고급재료로 쓰여

대기업도 열분해시설 투자 가속화
기름·가스·플라스틱 원료 뽑아내
수요 급증 속 수급 불균형 초래도
“정부 차원 업계별 할당안 고민해야”

“저기 면적 1㎡·두께 5㎜짜리 판재 하나가 원재료만 따지면 1000원이 안 되는데, 시장 가격은 70만원 정도 돼요.”

 

지난 23일 경기 고양시의 사단법인 ‘트루’ 2층 사무실에서 박준성 사무총장은 켜켜이 세워져 있는 플라스틱 판재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돋보이는 판재들은 트루가 진행 중인 ‘업플라스틱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버려진 장난감으로 만든 재생원료였다. 박 사무총장은 “우리는 이걸 ‘널’이란 이름으로 부른다”며 “책상과 의자, 작은 가구, 상패, 타일, 노트북 거치대, 시계 등으로 가공이 가능한 재료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23일 경기 고양시의 사단법인 트루 1층 창고 바닥에 수거된 폐장난감이 널브러져 있다.

1층 창고로 내려가니 트루가 수거한 폐장난감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박 사무총장은 “지난해 기준으로 기업을 통해 수거된 장난감이 3.6t, 일반 가정을 통해 온 게 2.75t”이라고 말했다. 이 창고 한쪽 벽면 선반에는 플라스틱 알갱이들이 색깔별로 깔끔하게 포장된 채 가득 쌓여 있었다. 그건 폐장난감을 분해, 세척한 뒤 파쇄해 얻은 재생원료인 플레이크였다. 한 장당 70만원이라는 플라스틱 판재는 이 플레이크에 열·압축 처리를 해 만든 것이다. 트루가 수거한 폐장난감 중 20% 정도가 플레이크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포장된 플레이크에는 각각 PE(폴리에틸렌), PP(폴리프로필렌), ABS(아크릴로니트릴 부타디엔 스티렌) 등 재질별로 이름표가 부착돼 있었다. PE의 경우 최근까지 1㎏당 평균 681원(올해 9월 기준·한국환경공단 조사), PP는 629원, ABS는 831원에 거래됐다.

 

트루는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된 장난감으로 돈이 되는 ‘자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폐플라스틱에서 자원을 찾고 있는 건 트루만이 아니다. 몸집 큰 석유화학 대기업들도 최근 플라스틱 재활용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미래 먹거리’가 된 플라스틱 쓰레기

 

폐장난감을 기부받아 주로 환경교육을 진행해온 트루가 업플라스틱 프로젝트를 가동한 건 2020년이었다. 1년여 시험을 거친 끝에 지난해 말 플라스틱 플레이크·판재와 같은 재생원료 생산을 시작했다. 이후 한국타이어·아모레퍼시픽 등 기업, 경기 가평군·강원 춘천시 등 지자체와 협업했다. 한국타이어와는 플라스틱 재생원료로 시계 2500개를 만들었고, 아모레퍼시픽으로부터는 화장품 플라스틱 공병을 넘겨받아 트루가 매장 내 집기를 만들어 납품했다.

폐장난감으로 만든 재생원료인 플레이크가 색깔·재질별로 포장된 채 쌓여 있다.

트루가 버려진 장난감으로 재생원료를 만든 건 폐플라스틱의 지속가능한 재활용 모델을 모색한 결과였다. 박 사무총장은 “폐플라스틱의 지속가능한 재활용을 위해서는 수익 모델을 정교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며 “일부 협업 성과가 있지만 아직까지는 품질 제고를 위한 시험 단계라 볼 수 있고 내년부터 본격적인 양산 체제에 들어갈 것이라 예상한다”고 말했다.

 

폐플라스틱 재활용 산업이 트루와 같은 환경단체에 ‘실험의 공간’이라면 석유화학 대기업에는 ‘기회의 공간’이다. 석유화학 대기업들은 폐플라스틱 재활용 부문에서 미래 먹거리를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들 기업은 트루처럼 폐플라스틱을 잘개 쪼갠 플레이크로 제품을 생산하는 ‘물리적 재활용’이 아닌, 폐플라스틱에서 기름을 뽑아내는 ‘화학적 재활용’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물리적 재활용은 제조공정이 단순하고 에너지 소모량이 작지만 재활용이 반복되는 경우 품질이 저하되는 한계가 있다. 화학적 재활용은 기존 플라스틱에 거의 근접하는 품질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복합재질·이물질 등 혼입으로 물리적 재활용이 까다로운 경우에도 비교적 쉽게 재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높은 기술력과 대규모 투자가 필요해 진입장벽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화학적 재활용의 핵심 기술로 평가받는 게 바로 열분해다. 이는 무산소 환경에서 폐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기름을 뽑아내는 기술이다. 이 과정에서 나온 열분해유는 정제 과정을 거치면 일반 원유처럼 플라스틱 원료인 나프타·경유로 가공할 수 있다. 기름으로 만든 플라스틱을 다시 기름으로 돌려보내는 셈이다.

플레이크로 만든 플라스틱 판재.

석유화학 대기업들은 이미 이 같은 열분해유 생산시설 구축에 대거 나선 상태다. SK이노베이션의 석유화학사업 자회사인 SK지오센트릭(옛 SK종합화학)은 2025년 하반기까지 울산 리사이클 클러스터(플라스틱 종합 재활용 단지) 부지 내에 폐플라스틱 6만6000t을 처리할 수 있는 열분해 공장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LG화학도 충남 당진시 석문국가산업단지에 2024년까지 2만t 규모 열분해유 공장을 신설할 예정이다. 롯데케미칼은 2024년까지 울산에 11만t 규모의 화학적 재활용 페트 공장을 신설한다. GS칼텍스는 지난해 12월 열분해유를 석유정제공정에 투입하는 실증사업에 착수했고, 2024년 가동 목표로 5만t 규모 설비 신설을 준비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신사업 개척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경영계 주요 가치로 대두되면서 석유화학업계의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 투자 결정이 단기간 내 이뤄졌다”고 말했다.

 

정부도 여기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그간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는 보일러 보조연료로만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돼 있었으나 환경부는 최근 폐기물관리법 시행령·시행규칙을 고쳐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데도 쓸 수 있도록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소관인 석유사업법 또한 석유정제공정에 열분해유 투입이 가능하도록 하는 개정이 검토되고 있다.

플라스틱 판재 노트북 거치대

장용철 충남대 교수(환경공학)는 “플라스틱 종류가 워낙 많을뿐더러 열안정제, 발포제, 분해촉진제 등 들어가는 첨가제만 100∼200개에 달한다”며 “단일 재질이 아니기에 쉽게 재활용하기 힘들다. 그만큼 폐플라스틱 열분해와 같은 혁신적인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기업이 나서야만 하는 영역”이라고 말했다.

 

◆불붙는 폐플라스틱 확보 경쟁

 

플라스틱 쓰레기는 어떻게 대기업의 미래 먹거리로 여겨지게 된 걸까. 그건 전 세계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플라스틱 규제에 고삐를 당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제5차 유엔환경총회에서는 플라스틱 전 주기를 다루는 구속력 있는 국제협약을 2024년까지 마련하자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이 협약에는 플라스틱 수요 억제와 재활용 확대를 골자로 하는 안이 담길 예정이다. 플라스틱 생산에는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8∼10%가 쓰인다. 생산부터 폐기까지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한 해 8억6000만t(이산화탄소 환산량)에 이른다. 이는 500㎿(메가와트) 석탄발전소 189개가 내뿜는 양에 맞먹는다.

 

선진국은 플라스틱 제품을 만들 때 재생원료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이미 시동을 걸었다. 유럽연합(EU)만 해도 2025년부터 페트(PET)병에 재생원료 25% 이상을 사용하도록 했다. 2030년부터는 그 대상이 모든 플라스틱 음료 용기로 확대되고 비율도 30%로 상향된다. 영국은 이미 플라스틱 포장재에 재생원료를 30% 이상 쓰지 않는 경우 별도의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이 같은 조치의 영향은 자국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소속 이성희 전문연구원은 최근 ‘국제사회의 플라스틱 규제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국내외적으로 플라스틱 제품 생산자·제조사에 재활용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 해외시장에 진출하는 우리 기업은 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당장 우리나라가 유럽에 수출하는 플라스틱 제품만 해도 연간 13억3500만달러(약 1조7000억원·2020년 기준)어치나 된다. 대유럽 수출품목 중 10위다.

플라스틱 산업에 재활용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떠오르면서 플라스틱 쓰레기의 ‘몸값’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 대기업과 폐플라스틱 재활용 중소기업은 최근 상생협약을 체결하고 대기업은 화학적 재활용, 중소기업은 물리적 재활용에 집중하기로 합의했지만 폐플라스틱 수급 문제는 여전히 불씨로 남겨 놓았다. 거기에 시멘트 업계까지 그간 전량 수입하던 유연탄을 대체해 가연성 폐기물인 폐플라스틱을 보조연료로 쓰고 있어, 플라스틱 쓰레기의 안정적 확보가 이들 업계의 핵심과제가 된 상황이다.

 

이런 수요 증가에 고유가까지 덮치면서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재생원료인 플레이크와 펠릿(세척 후 용융·압출을 거친 원료) 가격이 최근 1년 새 최대 20% 안팎의 상승세를 보였다. 한국환경공단 자료에 따르면 플레이크 중에서는 PE가 지난해 10월 1㎏당 561원이던 데서 올해 9월 681원으로 무려 23.6%나 올랐다. 펠릿 중에서도 PE가 같은 기간 726원에서 864원으로 상승률이 19.0%를 기록했다.

 

정부는 지난달 ‘전 주기 탈플라스틱 대책’을 발표하면서 이 같은 수급 문제 완화를 위해 폐플라스틱 배출·수거·운반·선별에 걸쳐 양질의 폐자원 공급 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혼합 수거나 오염을 막기 위해 운반차량 기준을 만들고 선별시설 자동화·현대화를 지원하는 등 조치를 통해 폐플라스틱 중 재활용되는 양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플라스틱 생활폐기물 발생량은 492만t(잠정)으로 코로나19 전인 2019년(418만t) 대비 약 18% 증가했다. 이런 가운데 절반 남짓만 재활용되는 게 현실이다. 2020년 기준 재활용되지 않고 매립·소각된 양만 42.9%(189만t)에 이른다.

 

정부가 대책을 내놓긴 했지만 단기간 내 수급난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화학적 재활용의 경우 석유화학기업이 사업에 첫발을 뗀 상황에서 폐플라스틱 공급 부족이 중대한 위험 요인으로 평가돼 투자·기술 개발 속도가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질·출처별로 각 업계에 할당해 과열되는 폐플라스틱 확보 경쟁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나온다.

 

배재근 서울과기대 교수(환경공학)는 “차라리 정부가 나서서 우선 물리적 재활용에 적합한 고품질의 폐플라스틱은 중소 재활용업계에, 상대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폐플라스틱이나 일회용 필름류 플라스틱은 화학적 재활용에 할당하는 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멘트업계는 분리수거가 되지 못해 종량제 봉투로 들어간 폐플라스틱 등 가연성 쓰레기를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고양=김승환 기자, 박유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