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도 현 정책과 제도의 적극적 개혁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성리학의 이론과 명분 중심의 경향에서 벗어나 현실에 직접 도움을 주는 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을 ‘실학자’라 칭하는데, 대표적 인물이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다.
유형원은 부친이 당쟁에 연루되어 사망하자, 관직 진출을 단념하고 민생과 국부 증진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가 은거한 곳은 조상 대대로 하사받은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愚磻洞)이었다. 호 반계는 ‘우반동의 계곡’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안정복은 유형원의 연보에서 ‘선생은 당쟁이 횡행할 때 태어나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저술하기를 즐겼다’고 하여, 유형원이 실학자가 된 것이 당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유형원 하면 떠올리는 개혁가, 실학자의 이미지는 그의 저술 ‘반계수록’에 담긴 토지, 교육, 과거, 관직 제도에 이르는 탁월한 개혁안 때문이다. ‘수록’(隨錄)은 ‘붓이 가는 대로 쓴 기록’이란 뜻이지만, 결코 한가히 책을 쓰지 않았다. 시대의 고민을 담아 구체적 개혁 방안까지 제시하면서 써 내려 갔다. 서문에서 유형원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현실에서는 과거 위주의 공부보다는 실제 현실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1670년쯤 완성된 ‘반계수록’은 저자 유형원이 재야의 학자였던 까닭으로 처음에는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반계수록’의 가치를 알아본 왕은 영조와 정조였다. 영조는 ‘반계수록’ 3부를 간행할 것을 명하였고, 정조는 화성(華城)을 건설하면서 ‘반계수록’에 제시된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하였다.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정책 아이디어가 절실히 요구되는 현시점에서, 개혁 교과서 ‘반계수록’이 주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부안의 반계서당에서 서해 바다와 곰소 염전을 바라보며 개혁을 구상한 유형원의 자취를 떠올려 보았으면 한다. 올해는 마침 유형원이 탄생한 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