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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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인권, 스포츠와 정치적 중립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경기에서 패배하고 16강 진출도 실패했는데 웃으며 자축하는 국민이 있다? 우리만큼이나 축구에 진심인 나라, 이란에서 벌어진 실화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미국 대 이란의 경기는 40여년 전 수교를 단절한 오랜 앙숙 간 대결이자, 국내에서 격렬한 반정부 시위 중인 이란의 불안정한 상황이 맞물려 정치적 긴장 속에 치러졌다. 미국의 1-0 승리로 경기가 끝나자 이란인들은 거리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환호했다.

정지혜 국제부 기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런 상황은 현재 이란 사람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체제에 놓여 있는지 역설적으로 조명한다. 경기 후 미국 CNN방송과 인터뷰한 이란 인권운동가 마시흐 알리네자드는 “지금 이란에서는 미성년자들까지 거리에서 총에 맞아 숨지고 있다”며 “국민들을 죽이는 정권이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포츠를 이용하는 행태를 이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알리네자드에 따르면 지난 43년간 이란 정권은 자국민들이 미국을 증오하도록 어린 나이 때부터 세뇌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인권마저 억압하고, 사람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정권의 실체 앞에서 이는 제대로 역풍을 일으켰다.

국가와 국민이 정면으로 충돌해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현재 이란 사회에서 여느 나라처럼 월드컵 응원을 한다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이란에서는 히잡 착용이 불량하다며 도덕경찰에게 붙잡혔다 의문사한 20대 여성 마흐사 아미니 사건이 촉발한 반정부 시위가 두 달 넘게 격화하고 있다. 현 정권을 탄생시킨 이슬람 혁명(1979년) 이후 최장 기간 끓어오르고 있는 분노다. ‘여성, 삶, 자유’(Women, Life, Freedom)라는 구호를 연령과 성별, 지역 불문하고 수많은 이란인이 외치고 있다.

SNS에 매일 업데이트되는 현지 소식을 보면 처참한 한편 어느 때보다 비장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군경의 유혈 진압에 사망한 이들의 프로필이 뜨고, 그럼에도 보란 듯이 히잡을 불태우며 저항하는 여성들의 영상이 끊이지 않는다. 11월 말 기준 총 시위자 약 9만명, 사망자 510명, 부상자 최소 1160명이라는 숫자에는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는 이란인들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

반정부 시위의 불씨가 된 ‘히잡 벗을 자유’는 여성 인권 문제이지만 이곳에서는 젠더 이슈보다 인류 보편의 권리 침해로 인식된다. 청년 여성들이 불을 지핀 시위에 많은 남성 역시 동참해 여성 해방을 함께 촉구하는 이유다. 여성의 몸, 선택권이 통제당하는 사회에서 남성이라고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보편 인권을 향한 이란 사람들의 뜨거운 투쟁에 세계인이 연대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만 국제사회 차원의 개입이 미진한 점은 다소 아쉽다. 타국의 정치적 상황에 끼어드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무지개 완장을 금지한 월드컵도 그렇고 이란 히잡 사태도 그렇고 그것이 정말 ‘정치적 중립’이냐고 되묻고 싶어진다. 인권 문제가 편 갈라 싸울 흔한 정치 논쟁에 불과하냐고도. 중립 같은 소리? 비겁한 변명이다.


정지혜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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