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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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산의마음을여는시] 나비처럼 잠들다

우남정

겨울이 한걸음 빨라졌습니다

그 걸음에 맞춰 옷가지들을 정리합니다.

 

재킷과 블라우스, 몇 개의 스커트와 바지

한철을 연출한 가난한 소품들

곤곤함이 배어든

유행과 거리가 먼 그런 옷들입니다

 

해를 넘기며 더러는 허리를 늘리고

단추를 옮겨 달고

어울리지 않을 것들과 섞여

시간을 견딘 것들

몇 가지는 솎아 내고 갈무리합니다

 

다시는 입을 것 같지 않은데

끝내 버리지 못하는 오랜 슬픔이 있습니다

올해도 우두커니 옷장에 서 있었어요

만지작거리자, 손끝에서 온기가 피어납니다

 

소매 끝에서 가만히 번져오는 모과 향기

사드락사드락 첫눈 내리는 소리

손발 시린 쓸쓸함도

곱게 접어 상자에 넣었습니다

 

두 소매를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허리를 반으로 접은 보랏빛 재킷 한 장이

나비처럼 잠들었습니다

 

그동안 겨울 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였는데 겨울이 성큼 걸어왔습니다.

옷장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옷을 하나하나 펼쳤다가 접어 버릴 상자에 넣었습니다.

일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았던 것부터 버리자고 원칙을 세워 놓고 옷가지를 버리다가

이사할 때마다 버리지 못했던 옷을 만지작거립니다.

신혼여행 갔을 때 입었던 그 옷소매 끝에서 모과 향기가 가만히 번져옵니다.

다시는 그 옷을 입을 것 같지 않은데 끝내 버리지 못하는 오랜 슬픔이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을 것들과 섞여 시간을 견딘 그 옷처럼

나도 그이와 평생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소매를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허리를 반으로 접은 보랏빛 재킷 한 장과

첫눈 내리는 소리와 손발 시린 쓸쓸함도 곱게 접어 버릴 상자에 넣었습니다.

훨훨 날고 싶은 나비의 꿈도 상자에 넣어 봉하고 잠을 자야겠습니다.


박미산 시인, 그림=원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