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 한 목소리로 ‘탈원전’을 외치던 세계 각국이 다시 원전으로 돌아왔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영향으로 에너지 위기를 겪자 원전을 축소하려던 국가들이 이를 미루고 있고, 많은 국가들이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원전 확대에 적극 나서고 있다. 원전이 친환경 에너지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란이 여전한 가운데 당분간은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원전 활용을 늘려갈 전망이다.
◆유럽, 전쟁발 에너지난에 “원전 늘리자”
‘탄소중립‘ 목표 시기를 2040년으로 설정한 네덜란드는 2035년까지 신규 원자력 발전소 2기를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10일(현지시간) 로이터, dpa통신 등에 따르면 네덜란드 경제기후정책부는 전날 이런 계획을 밝혔다. 네덜란드 정부는 발전용량 1000∼1650㎿ 수준의 원전을 건설해 전체 전력 생산량의 최대 13%를 담당하게 한다는 방침이다.
신규 원전 건설 후보지로는 기존에 원자로 1기가 운영되고 있는 제일란트주 보르셀 단지나 새로운 로테르담 등이 거론된다. 입지 선정 등 최종 결정은 2024년 말에 내려질 예정이며, 원전 건설 공사는 2028년 시작된다. 경제기후정책부는 2033년에 가동이 종료되는 보르셀 원전 원자로의 수명을 연장할 계획도 이날 밝혔다.
원전이 네덜란드 전체 에너지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에 불과하다. 그동안 네덜란드의 에너지 정책은 북부 흐로닝언 가스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에 크게 의존해 왔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는 ‘탄소중립’ 목표를 제시하고 가스 생산을 급격히 줄이면서 원전 확대 정책을 펼쳤다. 탄소중립을 실현할 친환경 에너지원으로서 원전 사용을 늘려가겠다는 의지다.
프랑스는 2050년까지 최대 14기의 신규 원전을 건설하겠다고 지난 2월 밝혔다. 프랑스는 전국에 56기의 원전을 보유하고 있으며 전체 에너지 생산량의 70∼75%를 원전에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원전이 노후화돼 유지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다. 프랑스는 현재 유럽에 닥친 에너지난을 해결하고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노후 원전을 연장 운영하고 새로운 발전소를 짓는 등 앞으로도 원전을 적극 활용할 방침이다.
영국도 원전을 에너지 정책의 핵심으로 두고 있다. 영국 정부는 현재 16%인 원전 비율을 25%까지 늘리기로 하고 신규 원전 건설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2025년까지 ‘탈원전’을 선언했던 벨기에도 올해 초 에너지 불안에 원전 운영을 10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폴란드와 체코도 원전 확대를 꾀하고 있다.
다만 일부 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원전에 강하게 반대한다. 탈원전에 앞장섰던 독일은 최근 유럽 에너지난이 현실화하자 올해까지만 운영하기로 했던 남은 원전 3기를 내년까지 연장운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년 4월이 정말 마지막“이라며 추가 연장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원전을 보유하지 않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지난 10월 유럽사법재판소(ECJ)에 유렵연합(EU)의 택소노미 분류체계를 무효로 해달라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했다. EU는 지난 7월 원자력을 친환경 에너지 분류 기준인 ‘그린 택소노미’에 포함시켰다.
레오노레 게베슬러 오스트리아 기후환경에너지부 장관은 “EU의 택소노미 규정은 무책임하고 불합리하다”면서 “원전과 가스를 부당하게 그린워싱하려는 시도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있다”고 밝혔다. 포르투갈, 덴마크 등도 오스트리아와 함께 원전에 반대하고 있다.
◆“탄소중립 위해…” 한·미·일도 원전 늘려
유럽뿐만 아니다. 글로벌 에너지 인플레이션으로 에너지난을 경험한 많은 나라들이 원전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심지어 ‘탈원전’ 흐름의 단초를 제공했던 일본도 최근 다시 원전 확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말 일본 경제산업성은 노후된 원자력 발전을 재건하고 최장 60년으로 규정돼있는 원전 운영 기간을 확대하는 행동계획안을 발표했다. 반대 여론이 높은 가운데서도 일본 정부가 원전 확대에 나선 직접적인 이유는 에너지 가격 상승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본은 올 여름 이상기온으로 전력 수요가 폭증했으나,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석유, 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급 불안을 겪었다. 일본의 원전 에너지 의존도는 원전사고 전 30% 이상이었으나 지난해 6%로 크게 줄었다.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은 “기시다 후미오 내각에 들어 일본의 원전 정책이 변화했다. 탄소중립과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 때문”이라면서 “2030년까지 원전 에너지 비중을 20%로 늘릴 계획이며 이 비율을 계속 유지하려면 신규 발전소 건설도 불가피하다”고 전했다.
세계 원전 가동 1위국인 미국은 2011년 이후 신규 원전 건설 계획 중 절반가량을 취소하며 원전 비중을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탄소중립 선언 이후엔 원전을 에너지 정책의 중심에 두고 있다. 미국은 소형모듈원전(SMR) 등 차세대 원전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으며, 원전을 ‘청정에너지’로 인정해 사업자에 광범위한 세제 혜택을 주기로 했다.
한국은 정권이 바뀌면서 ‘탈원전’에서 ‘원전 르네상스로’ 정책이 180도 바뀌었다. 한국에는 전체 24기의 원전이 운영되고 있는데, 운영률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 90% 이상에서 지난해 74.5%까지 줄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올해 원전 운영률을 82%까지 올리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 윤석열 대통령 공약이었던 ‘2030년까지 원전 비중 30%’(지난해 27%)를 달성할 계획이다.
한국 정부는 글로벌 원전 확대 흐름 속에서 원전 기술 수출에도 적극적이다. 한국의 첫 원전 수출 사례인 UAE 바라카 원전은 지난해와 올해 1,2기 가동을 시작했으며 3기는 올해 완공됐고, 4기는 현재 건설 중이다. 정부는 3조원 규모의 이집트 엘다바 원전 사업을 수주했으며, 현재 폴란드와 체코, 필리핀 등에도 원전 수출을 추진 중이다.
원전은 노후되면 결국 해체해야하는데 해체 기술과 경험을 갖춘 나라는 많지 않다. 향후 전 세계 노후 원전 해체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한국도 최근 ‘해체 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
지난 2일 산업통상자원부는 “전세계 영구정지 원전이 204기에 달해 원전해체가 본격화됨에 따라 해외 원전 해체 사업 모델을 구축할 계획”이라며 “2030년까지 3482억원을 투입해 전문기업 100개, 전문인력 2500명을 육성하고 1억달러 규모의 해외 원전해체 사업을 수주할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