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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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판에 새긴 칠레 사회상… 격변기 민중 삶의 흔적 담다

라우션버그 ‘코퍼헤드1985/1989’

1980년대 독재정권 폭압 짓눌린 곳서
예술 매개체로 문화 간 대화·이해 촉진
구리판 변색시키는 ‘타니싱 기법’ 사용
“예술만이 평화·자유 가져온다고 믿어”

37년 전 칠레 산티아고 국립미술관에서 선보인 이래 오래도록 전시된 적이 없는 로버트 라우션버그의 ‘코퍼헤드(Copperhead)’ 시리즈가 서울에 왔다. 서울 용산구 독서당로에 위치한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에서 미국 현대미술가 라우션버그(1925∼2008)의 개인전 ‘코퍼헤드1985/1989’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타데우스 로팍과 라우션버그 재단이 함께한 것으로, 1980년대 칠레 모습 모습이 담긴 코퍼헤드 연작과 사진 작품 약 20점을 선보인다. 전시 주축을 이루는 것은 코퍼헤드 연작의 출발점이 된 타니싱 기법 작품 ‘코퍼헤드 바이트(Copperhead-Bite)’(1985) 연작 8점이다. 평평한 구리판 위에 약품으로 화학 작용을 일으켜 변색시키는 방식의 회화다.

서울 용산구 갤러리 타데우스 로팍에서 미국 현대미술가 라우션버그(1925∼2008)의 개인전 ‘코퍼헤드1985/1989’가 열리고 있다.

라우션버그는 생전 1984년부터 1991년까지 7년간 ‘로키(ROCI)’라는 해외 문화 교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예술을 매개체로 문화 간 대화와 이해를 촉진하고자 한 것이다. 멕시코와 칠레, 베네수엘라, 티베트, 중국, 일본, 쿠바, 소련, 독일, 말레이시아 10개 나라에서 진행했다. 우정아 포항공과대학교 인문사회학부 부교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쓴 글에서 “개발도상국이나 전체주의 정부 통제를 받는 나라, 또는 미국과 거의 접촉이 없는 국가를 선택한 것”이라며 “오직 예술만이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오해를 없애고 평화와 자유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 작품은 로키 프로젝트 가운데 두 번째로 진행됐던 칠레에서의 프로젝트 결과다. 라우션버그는 1984년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 가 약 2주간 체류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또 구리 광산에 가 생산과 가공 공정을 보거나 각종 약품으로 구리판을 부식, 변색시키는 기법을 배웠다. 칠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작업실로 돌아와 작업에 돌입했고, 구리판에 칠레에서 찍은 사진들 속 도상을 넣어 부식을 통해 다채로운 시각 효과를 내는 작품을 완성했다. 1985년 칠레로 돌아와 산티아고 국립미술관에서 ‘라우션버그 해외 문화 교류전: 로키 칠레’를 열어 이 작품들을 공개했다. 이후 일부가 전시에 출품된 적은 있지만, 코퍼헤드 바이트 연작 8점과 관련 작품이 한꺼번에 소개되는 전시는 1985년 이후 이번이 처음이라는 설명이다.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이자, 피노체트 독재 정권의 폭압하에 놓여 있던 이 곳에서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세계적 작가의 전시는 논란이 됐다. 당시 칠레인들이나 미술가, 지식인에게서도 작품과 전시는 거센 비난을 받았다. 독재 정권의 허가 및 지원하에 작품을 준비하고 전시한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실제 작가가 산티아고에 도착한 다음 날 도심에서 차량 폭탄이 터지거나 그해 10월29일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전국적 시위가 일어나 사상자가 났다. 세계 최대 구리 생산국이었기에 칠레에 간 라우션버그가 구리라는 재료에 주목한 것은 당연했지만, 동시에 구리 광산이나 제련 공장은 최악의 정권이 노동 착취, 인권 탄압을 자행하던 곳이기도 했다. 전시 자체로 독재 정부의 승인 의미를 가졌던 국립미술관 전시이기도 했다.

 

당시 칠레 현지인들과 작가가 가진 대화 기록에 따르면 라우션버그는 ‘이런 짧은 시간에 칠레를 이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작품은 미완성이거나 실패작이 아닌가’, ‘칠레 국민 대부분은 이곳(산티아고 국립미술관)까지 올 버스비조차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칠레의 이미지를 어떻게 선택했는가, 정치적 현실을 알고 있는가’라는 추궁성 질문을 받았다. 라우션버그는 “미술가가 이 모든 혼란에 답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바로 순수를 유지함으로써”라고 답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라우션버그재단 관계자는 라우션버그의 다양한 작품군 중에서 한국에서 코퍼헤드 시리즈를 선보이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라우션버그는 한국 대중에게도 굉장히 익숙한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의 특색이 있으면서도 많이 선보인 적이 없는 작품, 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작품을 골라 보여주자는 취지로 이번 전시를 열었다”고 말했다.


글·사진=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