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르크 데무스, 잉그리트 헤블러, 라두 루푸, 루돌프 부흐빈더, 미켈레 캄파넬라, 조지 윈스턴, 개릭 올슨,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미하일 플레트네프, 엘렌 그리모, 예브게니 키신.
이들의 공통점은? 클래식 애호가라면 눈치챘겠지만 한국을 찾아 공연한 적 있는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이다. 여기에 하나 더. 이들의 내한 공연 당시 연주가 빛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 같다. 바로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명장 1호’ 이종열(84) 조율사이다. 이들 중 올해도 한국에 왔던 체코 출신 피아노 거장 부흐빈더(76)는 지난 6월 서울 예술의전당 공연 때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러 (콘서트) 홀을 가봐도 이런 피아노는 처음 본다. 피아노(상태)가 너무 좋다”고 감탄하며 예술의전당 피아노를 관리하는 이 조율사에게 경의를 표했다. 해외 연주 투어에 전속 조율사를 동반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캄파넬라(75)는 앞서 2006년 내한 공연을 이 조율사의 도움으로 완벽하게 마친 뒤 “미스터 리(이 조율사)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에 올 때는 전속 조율사를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되겠다”며 떠났다.
이들 외에도 손열음, 조성진, 임윤찬 등 이 조율사가 관리하고 조율한 피아노로 멋진 음악을 들려준 국내외 유명 피아니스트가 많다. 대부분 부흐빈더, 캄파넬라와 비슷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 조율사의 존재감이 ‘조율명장 1호’ 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수억원을 호가하는 명품 피아노라고 해도 관리가 소홀하거나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손을 빌려 봐야 청중을 감동시키는 소리를 내기 어렵다. 관객 눈앞에 보이지 않는 무대 밖 조율사의 역량이 피아노로 연주되는 음악의 품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피아노 조율이란 도레미파솔라시도 음정을 맞추는 좁은 의미의 ‘조율’과 연주에 필요한 건반의 기능이 잘 작동되도록 하는 ‘조정’, 음색과 음량을 알맞게 하는 ‘정음’을 통틀은 것이다. 조율은 결국 피아노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도록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들이 매끄럽게 연결돼야 연주자가 최상의 연주를 들려주고 청중이 감동할 수 있는 만큼 쉬운 작업이 아니다. 특히 콘서트홀 등 연주용 피아노 조율사들의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음악가들 특유의 예민하고 까다로운 요청 사항을 최대한 충족해야 하고, 온도나 습도, 연주자별 타건 방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피아노의 돌발 상황에 언제나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66년 전 독학으로 조율에 입문해 여든을 훌쩍 넘겨서도 현장을 지키는 이 조율사가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다. 지난 19일 그가 1995년부터 전속 조율사로 일하는 서울 예술의전당을 찾아가 만났다. 인터뷰는 입구에 ‘대한민국 명장’ 명패가 달린 그의 사무실과 항온·항습 기능을 갖춘 음악당 피아노 보관실에서 진행됐다.
―집안에 음악을 하신 분이 있거나 음악적 소질이 있었던 건가요.
“음악과 상관없는 전주 변두리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만 절대음감 등 음악적 소질은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시조창을 곧잘 하셨는데 몇 번 들으면 가사를 다 외웠다.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다른 아이들이 동요나 무용을 할 때 나는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시조를 읊어 선생님들이 즐거워하셨다. 또 집 행랑채 사랑방에 있던 장구, 꽹과리 등 농악기를 갖고 놀면서 평소 들었던 농악 가락을 따라 쳤다. 중학생 때는 할아버지처럼 대나무로 단소를 만들어 불렀다. 다만 국악 5음계인 ‘궁상각치우’ 구멍만 뚫은 할아버지 단소와 달리 나는 서양 음계로 ‘도레미파솔라시도’가 다 나오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론 부족해 반음계도 추가하고 다양한 음색이 가능한 단소를 만들어 외국 가곡 등을 불렀다. 우리 집안에서 아마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조율사가 아니라 피아니스트가 됐을 거 같다.(웃음)”
―조율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습니까.
“공부를 잘한 편이었는데 교사였던 작은 아버지가 나의 손재주를 눈여겨보고 권유해 공업 중고교에 갔다. 고3 때 옆 동네 교회에서 풍금(리드 오르간)을 보고 반한 뒤, 유교 사상이 완고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몰래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8남매 중 장남으로 대학 진학도 포기한 터라 맘 편히 하고 싶은 것 하자는 생각에 오르간 교본을 사서 독학으로 풍금치는 법을 배웠다. 이후 찬송가 전체를 연주해보는 등 연습에 몰두하다 반주까지 전담하게 됐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보다 그저 풍금을 얻게 돼 기뻤을 정도로. 그런데 어느 순간 풍금 소리가 불안정해졌고 불협화음을 고쳐보려다 더 나빠졌다. 풍금이 일본제라 조율에 관한 책을 일본에서 수입한 뒤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해가며 읽었다. 그렇게 익힌 조율법을 적용해 불협화음 문제를 해결했고, 주변 교회들 풍금마저 다 조율해줬다. 고교 졸업 후 군 복무 시절엔 조율 교재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 조율사가 보관 중인 그 당시 일본어 교재와 조율 교재 및 번역 자료는 오랜 세월 탓에 상태가 온전치 않았다.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조율에 대한 집념으로 열정을 쏟아부은 ‘청년 이종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피아노 전문 조율사의 길은 어떻게.
“제대 후 시내 풍금 악기점에 취직해 풍금 수리를 하다 악기점이 망해 상경했다. 지인 소개로 서울 충무로에 있던 수도피아노사에 들어가 공장에서 일하며 피아노 조율에 입문했다. 그러다 노사 문제가 불거져 3년도 안 돼 삼익피아노 영업부로 옮겨 애프터서비스를 담당했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조율사’란 강점을 활용해 성심성의껏 서비스를 하니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몸을 너무 혹사해 건강이 나빠졌고, 좌천성 발령까지 나자 4년 정도 다닌 회사를 미련 없이 관뒀다. 우리나라 최고 조율사가 되려고 열심히 해왔기 때문에 ‘독립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여유가 생겨 더 잘 조율해주니 입소문이 퍼졌고 많은 국내 일류 피아니스트가 고객이 됐다. 이후 198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피아니스트들 의견을 듣고 전속 조율사로 채용해 15년간 일했으나 모함을 당해 나와버렸다.”
―‘국내 최고’에서 ‘세계 최고’ 조율사의 꿈을 키우게 된 계기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일하다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을 보게 된 후 ‘국내 최고만 돼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담당하는 조율사도 세계적인 수준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독학으로 연마한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내가 제대로 하는 건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1987년부터 일본,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 등 조율에 강한 나라를 중심으로 교육기관, 피아노 공장 등을 찾아다니며 빠짐없이 배우려고 애썼다. 지금까지 20차례 가까이 해외를 다녀 왔는데 여행하러 간 건 단 한 번뿐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피아니스트 유형이 있나요.
“피아니스트의 연주 스타일과 연주할 곡의 특성에 맞는 피아노를 골라 정성스럽게 조율해 놨는데 엉뚱한 피아노를 가리키며 치겠다고 하면 난감해진다. 어쩔 수 없이 연주자 요구대로 다시 조율하긴 하지만. 특히, 소리 자체가 부드러운 피아노를 골라 놓고 소리를 쨍쨍하게 만들어 달라고 하거나 청중이 듣기 좋은 피아노 소리가 나도록 한 조율사의 판단을 무시한 채 연주자 자신의 고집만 부리면 정말 답답하다. 환자를 의사가 치료하듯 피아노 조율은 조율사를 믿고 맡겨줬으면 좋겠다.”
―‘조율 인생’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순간은.
“어디든 본인 피아노를 가져가 연주하고, 직접 조율할 만큼 완벽주의자인 지메르만(66)의 2003년 6월 내한 공연(예술의전당) 때다. 지메르만은 의심이 많아 연주장 모니터를 끄게 했고, 무대 위에 달린 마이크도 치우게 하더라. 리허설 전에 모든 문을 걸어 잠근 채 혼자 조율하길래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고 얼씬도 안 했다. 그런데 ‘조정’, ‘정음’을 마치더니 나를 불러 ‘조율’만 부탁하더라.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잘못하면 이 사람이 ‘한국의 조율 실력 별 볼 일 없다’라고 비난할까 봐. 큰 시험대에 오른 기분으로 평소보다 더 오래 집중해 조율을 마친 뒤 공연 종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연주를 마친 지메르만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고 하더니 무대로 나가 관객들에게 ‘완벽한 조율로 피아노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준 미스터 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해주었다. 지구 위에서 가장 까다로운 피아니스트가 나를 칭찬해주다니 만루 홈런을 친 기분처럼 보람되고 기뻤다.”
―얼마 전 임윤찬 리사이틀 당시 피아노 조율 과정은 어땠나요.
“임윤찬은 딱히 별다른 주문이 없었고, 조율해 둔 3대의 피아노 중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쳤다. 리허설 마치고 가는 길에 내 사무실에 잠깐 들렀길래 ‘대단하다’고 칭찬하면서 ‘앞으로 겸손해야 더 사랑받는다’고 조언했더니 ‘감사하다’고 하더라. 그동안 신성처럼 등장해 이름 알려지고 콘서트홀에서 몇 차례 협연하고 나면 금방 (스타 의식에) 젖어버리는 젊은 연주자를 많이 봤다. 초면인데 조율을 요청하러 와서 인사도 안 한 채 용건만 말하고 가는, 그런 기본이 안 된 친구들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선생님에게 ‘조율’은 어떤 의미인가요.
“종교와 같다. 재밌고 좋아서 미친 것처럼 알아가고 연구하는. 그렇게 한 우물을 파 왔는데 아직도 부족한 게 많다고 느낀다. 그래서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한다. 예전에 ‘나도 잘났다’라고 기고만장했던 적이 있는데, 조율을 하면 할수록 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그러지 않는다. 제자와 후배들에게도 ‘세계적 연주자가 왔을 때 그 사람이 흡족할 만큼 소리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이 주어질지 모르니 미리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순신 장군처럼 유비무환의 정신을. 배움에는 끝이 없다. 누구의 말이든 귀담아들으려 하고 팔십이 넘은 지금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고민한다.”
실제 그의 분신과도 같은 공구함 안에는 100개를 훨씬 넘는 다양한 조율 도구가 가득한데 이 중 상당수는 직접 만들거나 기존 제품을 개조해 효용성을 높인 것이다. 이 조율사는 불과 석 달 전에도 해머 헤드의 양모를 단번에 20개 바늘로 찔러 정음 작업의 능률을 획기적으로 향상한 피커를 개발해 쓰고 있다. 아울러 이런 도구 제작·활용법 등 60여년 갈고 닦은 조율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하려 힘쓴다. 국내 조율사들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