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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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켜진 고데기, 24시간 가동 세탁·건조기… 아무도 모르는 새 ‘불씨’가 모락모락 [심층기획-무인점포 화재 사각지대]

서울시내 10여 곳 돌아보니… 매장내 소화기 없는 곳 많아

카페·편의점·빨래방 등 업종 불문
아이스크림 가게 5년간 5배 폭증
비대면 일상… 증가세 지속될 듯

상주 인원 없이 전기 위험에 노출
1층 입점 많아 화재 땐 인명 피해
“감독받게… 다중이용업소 지정을”

일반 무인점포 통계 현황 파악 예정
위험성 높은 건물 화재 안전 조사도

지난 2일 찾은 서울 광진구의 한 무인 셀프 빨래방. 이곳에는 ‘주머니 속의 내용물(라이터, 볼펜 등)을 모두 꺼낸 후 건조기를 이용해달라’는 주의사항이 붙어 있었다. 옷 안에 일회용 라이터를 넣은 채 건조기를 작동시키면 고열로 인해 폭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대형 건조기 등 6대가 설치된 15평 규모의 매장 어디에도 소화기는 보이지 않았다.

 

무인 빨래방을 자주 이용한다는 직장인 전모(30)씨는 “빨래방 안에 소화기가 없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며 “빨래방이 위치한 건물이 다세대주택인데, 화재가 발생하면 피해가 클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마포구의 또 다른 무인점포 역시 빨래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 인근의 한 무인 사진관은 사진을 찍기 전 단장할 수 있도록 거울과 미용 도구 등을 비치해 놓았다. 흔히 ‘고데기’로 불리는 머리 손질용 전기인두가 놓인 탁자는 이미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곳 역시 소화기는 없었다.

 

이날 서울 시내에서 둘러본 10여 곳 무인점포 상당수는 이처럼 화재를 초기에 진압할 소화기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우후죽순 늘어난 무인점포가 화재의 사각지대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부 업종의 경우에는 아예 화재 예방과 관련된 규제를 받지 않는다.

 

무인점포가 얼마나 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카페와 편의점, 빨래방, 사진관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무인화가 이뤄지고 있는 데다 무인시설과 유인시설을 따로 구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무인 빨래방의 증가 추세를 감안하면 전 업종에서 무인점포가 급격히 늘고 있음을 추정할 순 있다.

3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무인 빨래방 사업자 상위 6곳의 가맹점 수는 2016년 3086개에서 2020년 4252개로 37.8% 증가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전국에 운영 중인 무인 빨래방이 약 6800개 이상인 것으로 추산한다. 편의점 주요 4개 업체의 무인매장 수 역시 2019년 208곳에서 지난해 6월 기준으로 2783곳까지 14배 가까이 폭증했다. 무인 아이스크림 판매점 수도 2017년 880여개에서 지난해 4000여개로 5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무인점포는 앞으로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게 업계 전망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비대면 거래가 이젠 일상으로 자리 잡았고, 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를 줄이려는 수요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리서치앤드마켓에 따르면 2019년 6748만달러(약 856억원)였던 전 세계 무인 편의점 시장은 2027년 16억4032만달러(약 2조835억원) 규모로 연평균 성장률 51.9%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됐다.

 

문제는 상당수 무인점포가 ‘다중이용업소’로 지정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카페와 노래방, 음식점, PC방, 게임제공업 등 26개 업종만 다중이용업소에 해당한다. 빨래방과 사진관 등은 여전히 포함돼 있지 않다. 다중이용업소는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매장 중 화재 등 재난이 발생할 때 생명과 재산상의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높은 곳이다. 다중이용업소법 시행령에 따르면 다중이용업으로 지정된 업소는 소화기와 경보장치 등을 갖추고, 소방당국으로부터 화재 위험 평가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한다. 아울러 영업주와 직원이 정기적으로 소방 안전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무인점포 특성상 화재 위험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김인혁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사회재난연구센터 선임연구원 등은 지난해 ‘다중이용업소 안전관리 개선을 위한 법적 소고-24시 무인점포의 화재안전 정책을 중심으로’ 논문에서 “코로나19의 영향과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의 발달로 24시 무인점포의 숫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라며 “이들이 소방안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만큼 향후 화재 발생 등으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연구진은 무인점포가 소비자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도심과 주택가 건물 1층에 입점한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화재가 발생할 경우 대규모 인명피해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상주 인원이 없기 때문에 초기 대응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신속한 신고도 기대하기 어렵다. 화재를 인지해 상층부 거주자들에게 화재 사실을 알릴 수 없어 적절한 피난도 힘들 수밖에 없다.

 

무인점포의 경우 인건비가 들지 않는 만큼 세탁기와 건조기, 냉동고 등을 24시간 가동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기존 다중이용업소에서의 화재 원인 중 전기적 요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인점포 역시 전기적 요인으로 인한 화재 가능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과정에서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아직까지 무인점포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한 적은 없다. 다만 화재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만큼 무인점포에 대한 안전 규제 강화가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0년 제주도 제주시에 위치한 한 무인 빨래방에서는 인화성 물질이 묻은 수건을 건조기에 넣었다가 화재가 났다. 같은 해 부산에서도 한 무인 빨래방에서 가동 중인 건조기에서 전기적 요인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심야 시간대에 일어난 사고로, 이용객에 의해 조기에 발견된 덕분에 큰불로 번지진 않았다.

 

서울에서 지난 4년간 무인시설에서 발생한 화제는 11건에 달한다. 2019년 3건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11월 기준으로는 6건으로 2배 늘었다.

 

김 연구원은 “무인점포는 다중이용업소법에 의해 규율되는 업종과 비교해 관리자의 부재로 화재 등 재난 발생 시 대응이 어렵고, 1층에 위치한다는 특성 때문에 화재 등 연소의 확산 위험도 더 크다”며 “무인점포에 대해서도 현행 다중이용업소법에 의한 화재위험평가와 같이 화재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세종2청사 소방청 모습. 연합뉴스

◆소방당국 20년부터 위험 평가… “다중이용업소 지정 검토”

 

무인점포가 화재의 사각지대로 떠오르면서 소방당국도 실태 점검에 나선다. 올해부터 무인점포를 대상으로 화재 위험 평가를 진행하는 한편 ‘다중이용업소’로 지정되지 않은 무인점포에 대해서도 지정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3일 소방청에 따르면 소방청은 올해 다중이용업소로 지정되지 않은 일반 무인점포의 통계 현황 파악에 나설 예정이다. 또한 이들을 대상으로 화재 위험을 평가해 화재 안전 등급이 낮은 업종에 대해서는 다중이용업 지정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화재 위험 평가에서 긴급하게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경우엔 건축물 및 영업장에 대해 화재 안전 조사도 함께 실시할 계획이다.

 

화재 위험 평가는 다중이용업소가 밀집한 지역 또는 건축물의 화재 발생 가능성과 위험성을 분석해 5개 등급으로 나누게 된다. 실제로 2019년 소방청은 화재 위험 평가를 통해 키즈카페와 방탈출카페, 만화카페 등 3개 업종의 화재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이들 업종을 다중이용업으로 편입했다.

 

전문가들은 무인점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만큼 예방책을 적극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새로 다중이용업소로 지정된다고 하더라도, 무인점포는 기존 다중이용업소와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맞춤형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진=뉴시스

다중이용업소의 영업주와 직원은 반드시 소방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그러나 무인점포의 경우 상주 직원이 없기 때문에 소방 교육이 화재 예방 대책이 되긴 어렵다.

 

김인혁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사회재난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24시간 무인으로 운영되는 특성 때문에 업주의 소방 관련 교육 이수를 의무화하더라도 업소 상주 인원이 없어 교육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김 연구원은 다중이용업소로 지정되지 않은 무인점포에도 자동 소화 및 경보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8년 6명의 사망자가 나온 서울 종로구 고시원 화재 사고 이후 노후 고시원과 산후조리원을 간이 스프링클러 설비 설치 의무 영업장으로 포함했듯, 무인점포에도 제도적으로 소방안전시설 설치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도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설치비용을 일부 지원하는 등 조속하고 신뢰성 있는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며 “이후 다양한 신규 업종들이 추가로 생겨나더라도 영업의 형태가 24시간 무인점포 형태로 운영된다면 안전관리 공백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백준무 기자 jm100@segye.com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