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다 로제타입니다. 나머지 등장인물도 나오는데 저희가 다 연기할 겁니다.”(견민성)
“헷갈릴 수 있을 것 같아 제가 다시 한번 설명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에마 수 해리스)은 외국인입니다. 한국말 할 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도 영어 할 줄 모릅니다.”(이소연)
지난 6일 서울 영등포구 복합문화기업 옐로밤 연습실. 연극 ‘로제타’의 일부 시범공연이 시작되자 미국인 배우 3명과 한국인 배우 5명이 흥겨운 드럼 연주 소리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면서 차례로 자기 소개를 한 다음 배우 견민성과 이소연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한국어와 영어 대사가 뒤섞이고 자막도 제공되지 않는 공연에 다소 당황할 수 있는 관객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한국어나 영어를 몰라도 연극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말이다.
연극 ‘로제타’는 130여년 전 고작 25살 때 의료 선교를 하러 혼자 한국 땅을 밟은 여성 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 이하 로제타)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로제타는 차별대우를 감내하며 살아야 했던 조선 여성에게 근대 의료와 교육의 여명을 열어준 인물이다. 최초의 여성병원을 설립하고 결핵 치료를 위한 크리스마스 실을 도입했다.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특수교사 오봉래와 한국 최초 여성 양의사 에스더 박(본명 김점동)을 지원하고 한글점자를 개발했다.
이처럼 숱한 공적으로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역시 의료 선교사로 자신이 한국에 온 이듬해(1891년) 뒤따라왔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1860∼1894)이 3년 뒤 청일전쟁 당시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전염병에 감염돼 숨졌다. 남편을 잃은 후 1895년 귀국했다가 2년 후 다시 입국했는데 얼마 안 돼 어린 딸마저 풍토병으로 잃었다. 미국서 타계 후 남편과 딸이 묻힌 양화진에 유해가 안장됐다. 한국 결핵 퇴치에 앞장 섰던 아들 셔우드 홀(1893∼1991) 부부도 같은 곳에 있다.
로제타가 남긴 일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이 작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국제공동 창작·제작 공연사업의 하나로 미국과 한국의 주요 극단인 리빙 시어터와 극공작소 마방진이 손잡고 무대에 올린다.
로제타 홀의 이야기를 연극화하기로 한 데는 리빙 시어터 출신으로 이번에 극작과 연출을 맡은 요세프 케이(한국명 김정한)의 역할이 컸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전에 우연히 방문한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 갔다가 로제타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작은 기념관(양화진홀)에서 그녀가 써놓은 일기 한 장을 보고 울어버렸어요. ‘나 길을 모르겠사오니 하나님 도와주소서’라고 삐뚤빼뚤한 한글로 쓴 한마디였습니다.”
15살에 미국으로 가 살다 30대에 귀국한 뒤 한국이든 미국이든 편하지 않았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던 요세프 케이 연출에게 그녀의 삶은 더 와닿았다.
그는 “로제타의 삶을 경험하기에 연극이 가장 좋은 매체라고 생각했다”며 “25살의 젊은 나이에 말도 모르는 조선에 와서 병원을 운영하며 어린아이처럼 고군분투한 그녀처럼, 이 작품도 어린아이 같은 에너지를 뿜어내길 바랐다. 한 사람의 아름다웠던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라고 전했다.
이 연극에 참여한 리빙 시어터 대표이자 배우 브래드 버지스는 “케이가 ‘(이 연극을 통해)미국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상기시켜주고 싶다. 미국이란 나라는 군사도, 돈도, 헐리우드도 아니고 이상에 따라 행해 왔던 나라가 아니었냐’라며 공연 제안을 했을 때 매우 흥분됐다”며 “관객들이 객석을 떠날 때 ‘당신도 로제타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스타 연출가이자 극작가 고선웅이 2005년 창단한 극공작소 마방진의 고강민 대표도 “‘로제타’는 그저 한국에 와서 좋은 일을 많이 한 미국인에 관한 게 아니라 인류애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라며 “보편적인 인류애를 다룬 이야기가 감동을 줄 것 같아 참여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리빙 시어터는 1947년 줄리안 벡과 주디스 말리나가 창단해 미국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의 시작을 만든 전설적인 극단이다. 세계연극사 중 현대연극의 한 장을 차지할 정도의 명성으로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등 아카데미상을 휩쓴 배우들이 거쳐 갔다. 요세프 케이 연출은 “리빙 시어터는 누구와 무엇을 위해 일하냐가 중요한 극단이다.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끊임없이 변화했기 때문”이라며 “로제타 프로젝트를 추진했을 때 리빙 시어터가 바로 떠오른 이유”라고 했다. 브래드 버지스도 “우리는 작품을 만들 때 관객들이 극장을 떠나며 좋은 변화를 갖기를 원한다. 세상을 좀더 좋게 변화시키기를 원하고,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 하는 일”이라고 했다.
연극 ‘로제타’에는 브래드 버지스와 리빙 시어터에서만 50년간 활동한 배우 토마스 워커, 에마 수 해리스 3명이 극공작소 마방진 배우 5명(견민성·김하리·원경식·이경구·이소연)과 호흡을 맞춘다. 남녀 각각 4명 배우가 성별과 나이와 무관하게 로제타와 주변 인물 역할을 번갈아 하는데, 리빙 시어터의 앙상블 테크닉을 도입한 것이다. 토마스 워커는 “한 명이 주된 배역을 하는 게 아니다. 배역을 뛰어넘어 물 흐르듯 대사들이 이뤄진다. 누군가의 지휘에 따라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연출된다”고 설명했다.
오는 13∼14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에서 시범공연을 한 뒤 절차에 따라 본공연 여부가 결정된다. 이르면 내년 미국 뉴욕 공연도 추진 중이다. 이강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장은 “국제공동 창작·제작 과정에서 가장 염두에 두는 게 ‘우리가(관객이) 자막으로 (내용을) 해석하고 대사를 이해해야 하는 한계를 넘을 수 없을까’에 대한 고민인데 연극 ‘로제타’는 ‘자막이 필요없는 국제 공동 창작도 가능하구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국제공동 창·제작을 통해 로제타란 인물을 소개하고 콘텐츠로 다루게 된 것도 의미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