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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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 병역비리 악용 '불똥'…"꾀병치부·모방범죄 우려"

"환자·가족 사회적 제약·차별 심해질까 불안 호소"
"꾀병 치부되고 질환자 면역기피 의혹시선 우려"
"뇌전증 진단, 뇌파·MRI·발작양상 등 종합 고려"
"병역면제 기준 강화 아닌 범죄자 엄중처벌해야"

최근 '허위 뇌전증(옛 질병명 간질)' 병역 비리 사태가 확산하면서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에게 '불똥'이 튀고 있다

 

10일 대한뇌전증학회에 따르면 허위 뇌전증 진단서를 발급받는 방식으로 병역을 기피한 혐의로 스포츠 선수·가수 등 70명 이상이 수사선상에 오른 가운데 뇌전증 환자와 가족들은 이번 병역비리 사건으로 뇌전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져 사회적 제약과 차별이 심해질 지 모른다는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국내 뇌전증 환자 수는 5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작년 2월 부산 수영구 부산병무청에서 병역 대상자들이 신체검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신원철 강동경희대병원 신경과 교수(대한뇌전증학회 사회이사)는 "뇌전증이 병역기피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환자와 가족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면서 "뇌전증이 꾀병처럼 치부되고, 실제 뇌전증으로 병역이 면제된 경우에도 의혹의 시선을 받을까봐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25년간 진료를 보면서 뇌전증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진학이 좌절되거나, 파혼을 당하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을 여럿 봐왔다"고 덧붙였다.

 

뇌전증은 기억과 학습에 관여하는 대뇌피질의 신경세포가 일시적으로 이상을 일으켜 과도한 흥분 상태를 유발해 의식 소실, 발작 등이 만성적,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뇌 질환이다. 대뇌에서는 서로 연결된 신경세포들이 미세한 전기적인 신호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데, 이런 정상적인 전기 신호가 비정상적으로 잘못 방출되면 발작이 나타난다.

 

이번 병역 비리는 뇌파나 자기공명영상(MRI) 검사 만으로는 뇌전증을 판별해 내기 힘들고, 간헐적으로 발생해 의사가 환자 설명에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악용했다.

 

신 교수는 "뇌파와 MRI로 뇌전증을 진단할 수 있는 확률은 50% 정도"라면서 "뇌 병변이 아주 작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변화만 있다면 뇌파나 MRI로만 진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뇌전증 발작은 팔, 다리가 뒤틀리는 운동성 발작이 있는가 하면 본인만 느끼는 감각성 발작도 있는데, 발작이 간헐적으로 있는 데다 뇌파나 MRI 검사시간도 각각 30분 정도에 불과하다는 이유다.

 

의료 현장에서는 보통 뇌파나 MRI만으로 뇌전증 진단에 한계가 있어 발작의 양상, 혈액 내 항뇌전증약의 양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진단한다고 한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 신경과 A교수는 "환자나 보호자가 뇌전증 발작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발작이 나타날 때 특정 뇌 부위에서 주변 부위로 전기적인 신호가 퍼져 나가는 패턴을 보고 분석해 알 수 있다"면서 "또 다른 모방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어 자세히 말할 순 없다"고 말했다.

 

의료계에서는 사회적 낙인과 편견으로 뇌전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진료를 받지 않는 환자들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병역 비리에 대한 사회적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허경 세브란스병원 신경과 교수(대한뇌전증학회 이사장)는 "뇌전증은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고 꾸준한 자기 관리와 치료를 통해 대부분의 환자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면서 "뇌전증 환자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와 지지를 보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병역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 역차별을 조장할 수 있는 병역 면제 기준을 강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뇌전증 병역 면탈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엄중 처벌하고 범죄행위를 막을 근본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