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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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칼바람에 얼었다 녹았다… 자연과 함께 키운 ‘금빛 황태’ [밀착취재]

강원 인제군 용대리 ‘황태마을’

1708m 백두대간의 중심, 설악산 안쪽에 자리한 강원 인제군 용대리 황태마을 사람들은 칼바람을 동반한 첫 추위가 찾아오자 얼굴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추위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 올해는 날씨가 일찍부터 추워져서 황태가 풍년이겠어.” 다리골 황태덕장에 명태를 내거는 김재식(64) 대표의 목소리에 힘이 넘쳐난다. 올해 60만마리 명태를 걸고 황태로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다.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 황태마을 주민들이 다리골황태덕장에서 명태를 널고 있다. 덕장에서 건조에 돌입한 명태는 오는 4월까지 약 4개월간의 오랜 기다림을 거쳐 황금빛 황태로 탄생한다.

1960년대 말 6·25전쟁을 거치면서 피란 온 함경도 사람들이 고향의 맛을 찾다가 함경도와 날씨가 비슷한 진부령 일대에서 황태를 만들어 먹기 시작하며 용대리 황태마을이 생겨났다. 강원 고성, 속초에서 명태를 잡아 고갯길을 넘어 명태를 널기 시작하면서 덕장들도 점점 늘어났다. 지금은 150여가구의 주민이 밭농사와 함께 황태를 가공해 팔아 주요소득원으로 삼고 있다.

예전에는 동해에서 명태가 잡혔지만 1980년대 이후 급속한 지구온난화로 한류성 어류인 명태는 북태평양 오호츠크해 및 캄차카해역으로 올라갔다. 지금은 용대리 황태마을로 들어오는 명태의 대부분이 러시아산이다. 부산항으로 들어온 명태는 배를 가르는 할복작업을 거쳐 냉동 보관한 뒤 12월 말쯤 덕장으로 옮겨진다. 덕장에서 건조에 돌입한 명태는 4월까지 약 4개월간의 오랜 기다림을 거쳐 황태로 탄생한다.

다리골황태덕장 저온저장창고에서 지난 2022년에 수확한 황태를 출하하고 있다.
황태마을 주민들이 덕장에 명태를 널고 있는 모습.

최상급 황태를 만드는 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눈, 바람, 추위를 꼽는다. 세 가지 요소가 맞아떨어져야 품질 좋은 황태가 만들어지는 만큼 덕장사람들은 황태농사를 흔히 ‘날씨와 동업한다’고 한다. 백두대간에 위치한 용대리는 지역적 특성상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린다.

고지대라 겨울철 기온도 낮고 바람도 거세다. 영하 15도와 영하 2도를 오르내리는 동안 덕장에 걸린 명태에 쌓인 눈이 얼었다 녹으면서 명태에 수분을 공급한다. 수십 차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게 되면 그만큼 쫄깃한 맛을 내게 된다. 이때 강한 바람은 명태를 잘 마르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바람이 없으면 명태가 마르지 않아 상하게 된다. 용대리 황태는 20만㎡ 부지에 있는 20여개 덕장에서 약 3000만마리의 명태가 황태로 변신한다. 용대리 덕장 사람들에게 이 겨울 추위는 반가운 손님이다.

칼바람을 동반한 추위가 찾아오자 마을 주민들이 불을 피우고 손을 녹이고 있다.
다리골황태덕장 작업장에서 황태마을 주민들이 포뜨기 작업을 마친 황태를 크기별로 분류하고 있다.
황태 뼈가 건조대에 널려 있다. 황태 포뜨기 작업을 마치고 나온 뼈는 육수용으로 판매된다.

덕장에서 최적의 기후조건으로 잘 마른 황태의 겉은 바삭한 촉감이지만 속살은 부드럽다. 용대리 황태마을에서 가공, 생산되는 황태는 생산량만큼이나 맛도 으뜸으로 꼽힌다. 고소하고 담백한 맛과 쫄깃한 육질은 구이와 황태국, 황태무침으로 만들어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황태와 함께 45년을 살아온 김재식 대표는 말한다.

다리골황태덕장 판매장에 황태가 전시되어 있다.
다리골황태덕장 김재식 대표가 건조장에 걸린 명태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10대 후반부터 덕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992년 다리골황태덕장이란 이름을 내걸고 내 덕장을 운영한 지 20년째다. 아들과 사위가 덕장과 식당 운영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덕장을 지키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가업으로 이어갔으면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덕장과 함께했으면 한다. 덕장은 삶의 여정을 함께한 동시에 가족의 생계를 이어준 고마운 존재이다. 매년 봄에 황금빛 황태가 탄생할 때는 아직도 마치 자식을 얻은 것처럼 기쁨이 넘친다.”


인제=글·사진 이재문 기자 m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