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장들이 앞다퉈 억대의 ‘최고급 전기차’로 관용차를 교체하면서 ‘친환경자동차법’이 본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차량 선정이나 옵션·계약 기간 등에 관한 정부 차원의 기준이 없다 보니 차량 임대료도 천차만별이다. 수천억원대 적자를 낸 한 기관에서는 ‘대형 전기차’의 출고가 늦어진다는 이유로 탄소 배출량이 많은 ‘최고급 내연기관차’를 타는 일도 벌어졌다.
11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서범수 의원실이 국토교통부 산하 7개 공공기관의 지난해 말 기준 임원 관용차 이용현황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상당수 기관장이 ‘제네시스 G80 전기차’를 리스나 렌트 방식으로 임차하는데 매월 200만원 안팎의 비용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네시스 G80 전기차는 출고가 8281만원으로 옵션에 따라 1억원을 호가한다. 예를 들어 월 200만원씩 36개월간 임차 계약을 맺으면 3년간 운용비만 7200만원에 이른다. 이는 내연기관 제네시스 G80(5507만∼6457만원) 신차 가격보다 높은 수준이다.
정부는 친환경자동차법을 통해 공공기관에 전기차·하이브리드차·수소전기차 등의 구매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또 대통령령인 ‘공용차량 관리규정’에도 경차 및 친환경차 구매를 노력하라고 정한다. 기관장들은 이를 핑계로 앞다퉈 최고급 전기차로 관용차를 교체하는 실정이다.
기관별 임원 차량 이용현황을 보면 한국공항공사는 윤형중 사장과 부사장, 상임감사 등이 모두 G80 전기차를 월 193만원을 내고 임차해 이용한다고 보고했다. 전기차 3대를 3년간 임차하기 위해 총 2억4300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한국공항공사의 매출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반 토막 나 5000억원대를 찍었고, 2021년 영업이익은 2739억원 적자를 기록한 상황이다.
공항공사가 요구한 옵션 내용을 살펴보면 기본 내장 대신 270만원짜리 고급 내장재(옵시디언 블랙 모노톤)를 선택했고, 주행보조 기능 등이 담긴 550만원의 파퓰러 패키지, 140만원의 솔라루프, 문이 부드럽게 닫히는 고스트도어클로징 기능이 포함된 180만원짜리 컨비니언스 패키지, 뒷좌석 수동식 도어커튼 등이 들어간 110만원의 2열 컴포트 패키지 등을 선택했다. 이 같은 옵션을 포함한 가격은 차량 견적 기준 1억169만원(개별소비세 할인 미적용)이며 임차료도 그만큼 올라갈 수밖에 없다.
공항공사는 지난해 5월 차를 계약했지만 신차 출고가 늦어져 지난해 10월 말에야 차량 2대를 먼저 인도받았다. 그러자 신차를 받지 못한 공항공사 한 임원은 전기차 대신 제네시스의 3500cc급 대형 내연기관차인 G90을 타게 됐다. 이 차량의 공인 연비는 9.3km/L, 탄소 배출량은 184g/km로 준대형 하이브리드 차량보다 탄소 배출량이 2배가량 많다. 정부가 친환경차 보급을 장려한 법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일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공항공사 관계자는 “지난해 차량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G80 전기차를 주문했으나 제조사 측의 출고 일정이 늦어져 지난 2달간 렌터카 업체에서 같은 금액에 제공해준 현 차량(G90)을 탑승하고 있다”며 “이달 중 전기차가 입고되는 즉시 교체할 예정”이라고 해명했다.
공항공사와 수의계약을 맺은 경기 성남시에 있는 해당 렌터카 업체에 문의한 결과 G80 전기차는 재고가 없는 것이 맞았지만 다른 중형급 전기차는 재고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 한 대형 렌터카 업체 관계자는 “옵션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G80 전기차 재고가 있어 즉시 출고도 가능하다”고 전했다. 이 같은 사실을 전달하자 공항공사 측은 “업체에서 제공한 차량을 단순히 이용해 왔는데 다른 전기차가 있다면 다시 확인해보겠다”고 알려왔다.
모든 기관장이 최고급 전기차를 택한 것은 아니다. 한국도로공사는 지난해 9월 물러난 김진숙 사장이 전기차인 현대차의 아이오닉5를 5550만원에 구매해 이용했고, 부사장은 기아 카니발 렌트비로 연 1056만원(월 88만원)을 지출했다. 다만 감사는 G80 전기차를 빌려 지난해 연간 2750만원(월 229만원)을 썼다.
한국철도공사 나희승 사장도 현대차의 수소전기차 넥쏘를 월 69만5000원에 빌려 이용했고, 부사장은 그랜저 하이브리드를 월 92만원을 내고 탔다. 이 기관 상임감사는 2021년까지 G80 내연기관 차량을 월 120만원에 이용하다가 지난해 G80 전기차로 교체하면서 현재는 월 185만원을 지출했다.
과거에 구매한 차량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기관도 있었다. 제주자유도시개발센터(JDC)는 2016년 5480만원에 구매한 구형 제네시스 G80(DH)을 이사장용 관용차로 이용 중이다. JDC의 상임감사는 현대차 그랜저 하이브리드를 월 91만6000원을 내고 이용했다.
같은 차량이라도 옵션에 따라 월 임차료도 차이를 보였다. 인천국제공항공사는 김경욱 사장과 상임감사가 G80 전기차를 각각 월 196만원과 183만원에 임차했고, 부사장은 그랜저 하이브리드를 월 82만원에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부동산원은 지난해 손태락 원장과 감사, 부원장이 모두 G80 전기차를 빌렸는데 손 원장은 렌트비로 월 191만원, 감사와 부원장은 177만원을 매월 지출했다. 앞서 2021년 당시에는 감사와 부원장은 기아 K8 하이브리드 차량을 이용해 월 84만원을 지출했는데 전기차로 바꾸면서 매월 100만원가량 고정 지출이 늘어났다.
계약 기간에 따라서도 가격은 차이가 났다. 법인 임대차량은 통상 3년 계약을 맺지만, 4년 계약을 맺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이한준 사장이 타는 G80 전기차는 다른 기관장들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월 160만원을 냈고, 부사장과 상임감사는 카니발을 월 86만원을 내고 탔다.
공공기관의 친환경차 도입이 늘고 있지만 아직 차량 관리규정에 이를 반영한 기관은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차량 구매 기준을 배기량에 맞추거나 엔진오일 등 전기차에서는 유지·보수가 필요하지 않은 부품에 대한 규정이 담긴 기관이 많았다. 또 전기차는 내연기관차와 달리 타이어 마모가 빠르고, 배터리 관리 등에 더 신경 써야 하지만 이에 관한 규정도 빠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전기차 보급 확대에 맞춰 차량관리운용 규정을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는 이유다.
서범수 의원은 “친환경차를 보급하자는 본래 취지는 좋지만 무조건 억대에 육박하는 최고급 전기차로 바꾸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수천억원대 적자를 내는 기관에서 전기차 물량이 없다는 이유로 원래 타고 있던 차보다 탄소 배출량이 더 많은 비싼 차를 타는 경우도 있는 만큼 각 공공기관은 국민 눈높이에 맞는 차량관리운영 기준을 다시 마련하고 이를 공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