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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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못 아냐”… 서점가 휩쓴 정신과 의사들의 ‘마음 처방전’ [이슈 속으로]

심리상담 에세이 인기몰이

의사 9명 경험담 담은 ‘그대의 마음…’
여성 전문의가 쓴 ‘언니의 상담실’ 등
불안 시달리는 현대인에 위로 메시지

‘당신이 옳다’ 4년 만에 50만부 판매 등
최근 출판시장 불황에도 꾸준한 인기
의료계 “진료실 넘어 대중과 소통 시도”

“이태원 참사·직장 내 괴롭힘 등에 노출
누구나 겪을 수 있다는 공감 형성 중요
책 통해 좋은 위로 받고 도움 되었으면”
# 직장인 김모(36·여)씨는 지난 1년 6개월간 총 15권의 책을 샀다. 이 중 11권이 심리·정신을 키워드로 하는 책. 김씨는 심리 관련 책을 많이 읽은 이유에 대해 “2년 전 회사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엎어지고, 사내 구설에 오르면서 10여년의 직장 생활에 회의감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한번 자라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는 무기력과 우울감에 사로잡혔다”며 “이후 서점에서 심리상담 에세이를 접하고 ‘위로받고 치유받는 느낌’이 들어 계속 관련 책을 읽게 됐다”고 고백했다.

 

최근 출판가에 ‘진출’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늘고 있다. 기존의 정신건강의학책이 우울증이란 무엇이고, 어떤 치료를 받고 어떤 약을 먹느냐는 전문적인 정보 제공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최근에는 공감과 위로, 치유가 중심이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상담하듯, 친구에게 조언을 건네듯,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김은영 서울의대 교수, 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 경희대병원 백종우·백명재 교수, 전진용 울산대병원 교수 등 9명의 의사가 본인의 경험담을 편안하게 풀어낸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가 이달 초 출간된 것을 비롯해 최근 6개월여간 나온 정신과의사의 심리상담 에세이는 줄을 잇는다. 인터넷에서 누적 조회 수 30만뷰를 기록한 뉴스레터 ‘언니단’을 엮은 ‘언니의 상담실’ 역시 여성학자이면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반유화 작가가 쓴 책이다. 인천성모병원 허휴정 교수는 마음과 몸이 연결됐다는 점에서 ‘마음이 힘들면 몸을 살짝 움직입니다’를 펴냈고, 정두영 유니스트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는 ‘마음은 단단하게 인생은 유연하게’를 지난해 8월 출간했다. 이외에도 ‘걷다 보니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공황인 것 같아서 불안합니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등 다양한 책이 서점가에 나왔다.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는 최근 50만부 판매를 돌파, ‘스페셜 에디션’이 나오기도 했다. 2018년 출간 후 4년 만에 50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것이다. 이 책은 2019년 공공도서관 비문학 분야 도서 중 대출 1위를 기록할 만큼 높은 인기를 누렸다.

출판가에서 ‘정신과 의사’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는 결국 높은 수요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문득 ‘나 잘하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가 하면, 부동산 급등락에 따른 상실감, 낮은 월급으로 인해 노력해도 미래가 없다는 불안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조급함으로 뛰어든 주식이나 코인에서 돈을 날리면서 생긴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3년으로 비대면이 일상화하면서 많은 사람이 더욱 위축됐다. 정신건강의학과 방문 환자들이 늘어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0년 53만여명이던 우울증 환자는 2021년 92만여명으로 10여년 새 74% 이상 증가했다.

높은 수요에 따라 국내 의료진뿐 아니라 해외에서 인기를 얻은 심리 치유책도 봇물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두 달 새만 ‘우울에서 벗어나는 46가지 방법’, ‘적당히 느슨하게 조금씩 행복해지는 습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고통’, ‘좋은 운은 좋은 사람과 함께 온다’ 등이 연이어 서점가에 나왔다.

‘당신이 옳다’를 펴낸 해냄출판사 관계자는 “최근 도서 분야 판매량이 매년 20∼30%씩 줄어들 만큼 판매량이 많지 않다. 이런 와중에 50만부는 불과 3∼4년 전 80만부와 유사한 수준”이라며 “책 판매량은 처음 출간 이후 1년 안에 다 나오는데 ‘당신의 옳다’의 경우 매년 비슷한 판매량을 보일 만큼 꾸준히 사랑받았다. 그만큼 마음이 지치고 힘들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많은 것을 느꼈다”고 전했다.

각 책의 부제는 이를 대변한다. ‘상처와 관계를 치유하는 여행기’, ‘정신과 의사가 권하는 인생이 편해지는 유연함의 기술’, ‘낙인과 혐오를 넘어 이해와 공존으로’, ‘지식이 아닌 공감을 전하는 이야기’ 등 공감과 치유에 방점을 찍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경우 단순히 약물 처방뿐 아니라 ‘상담’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대부분 언변도 좋고 전하고 싶은 말도 많아 글을 쉽게 풀어쓴다”며 “최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이 진료실을 넘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상처를 감추고 어긋나던 청년을 결국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게 한 대사처럼, 요즘 사람들이 듣고 싶었던 말 역시 위로와 공감인 셈이다. 지금 흔들리고 있는 당신에게 정신과 의사들이 나지막이 글로 전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라고.

◆백명재 경희대병원 교수 “일상적 트라우마, 남의 일 아닌 우리 모두의 일”

 

“우리 사회는 일상적 트라우마에 노출돼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재난뿐 아니라 학교폭력, 성폭력, 교통사고, 직장 내 괴롭힘 등이 계속되고 있는 거죠. 이런 일상적 트라우마가, 남의 일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공감을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근 동료 의사들과 ‘그대의 마음에 닿았습니다’를 펴낸 백명재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25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의료진의 심리치유 에세이가 늘어난 데 대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지적했다.

 

백 교수는 중증정신질환 위주였던 과거에 비해 최근에는 직장, 인간관계 문제 등으로 우울증, 불면, 공황장애 환자들이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변화를 설명했다. 하지만 경증이라고 접근법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겉으로 위태롭고 우울해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혀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렵게 힘든 얘기를 꺼냈을 때 ‘이겨내면 되지’, ‘지금까지 잘해왔잖아’라고 웃어넘기면 다시는 이런 얘기를 꺼내지 않게 됩니다. 상대방이 신호를 보낼 때보다 세심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거죠.“

백명재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백 교수는 사회 전반적으로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개선돼야 함을 강조했다. ‘라떼는 말이야’ 식으로 견딤을 강요하거나 ‘꾀병’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군대가 대표적이죠. 군대 복무 기간이 이전보다 절반가량 줄고, 가혹행위도 줄어서 환경이 좋아졌는데 ‘왜 너는 못 이겨내냐’는 시선으로 ‘꾀병’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아요. 간부급에서 그런 시선을 가진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이번 책을 통해 의료진이 개인의 경험담, 트라우마를 털어놓으며 환자에게 공감과 위로로 다가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 교수는 책을 통해 심각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살과 트라우마, 중독 등의 문제에 사회의 관심이 커졌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자살로 인해 사망자가 1년에 1만5000여명에 이릅니다. 중독, 트라우마 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상담으로 충분히 호전될 만한 분들이 책을 통해 좋은 위로를 받고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진수 기자 je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