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제우스가 낳은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는 어떻게 바쿠스가 됐나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로마 토속신화와 그리스신화 결합 로마신화 탄생/그리스 포도 품종 안소니카 수천년 시간 뛰어넘어 이탈리아 시칠리아·질리오섬에서 꽃 피어/안소니카로 빚는 비비 그라츠 화이트 와인 탄생

 

비비 그라츠 스코페토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이 시작된 아름다운 베키오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우피치 미술관.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배경무대 피렌체 두오모와 조토의 종탑을 지나 다비드상을 만나는 시뇨리아 광장에 들어서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미술품을 소장한 우피치 미술관이 보입니다. 특히 와인마니아라면 피렌체 여행에서 우피치 미술관을 지나칠 수 없죠.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라파엘로 등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속에서 우아하게 와인 잔을 들고 있는 카라바조의 걸작 ‘바쿠스’가 바로 우피치 미술관의 소장품이기 때문입니다. 바쿠스는 디오니소스와 같은 ‘술의 신’이자 ‘와인의 신’입니다. 같은 신이 왜 다른 이름으로 불릴까요.

 

피렌체 두오모

 

 

베키오 다리

◆그리스·로마 신화와 ‘와인의 신’ 디오니소스

 

술의 신이 그리스신화에선 디오니소스로, 로마신화에선 바쿠스로 등장합니다. 로마인들은 전성기때도 그리스 말을 배울 정도로 그리스 문화를 숭상했는데 그리스 신화가 로마로 넘어가 로마의 토속신화 합쳐져 탄생한 것이 로마신화랍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신화와 로마신화는 거의 비슷합니다. 보통 ‘그리스·로마신화’로 불리는 이유죠. 다만 그리스신화에선 신들이 주인공이고, 로마신화에선 인간의 사건들이 중심으로 신들은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우피치 미술관 작품들

 

우피치 미술관 소장 카라바조 '바쿠스'

 

로마신화에선 신들의 이름이 바뀝니다. 최고신 제우스는 유피테르(주피터),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넵투누스, 전쟁과 지성의 여신 아테나는 미네르바, 불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불카누스, 여행의 신 헤르메스는 메르쿠리우스,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비너스, 전쟁과 파괴의 신 아레스는 마르스, 사랑의 신 에로스는 큐피도(큐피드)가 됩니다. 앞뒤로 두개의 얼굴을 지닌 야누스 정도가 로마신화에만 등장합니다.

 

귀스타브 모로 '제우스와 세멜레'

 

그중 디오니소스(Dionysos)는 어떻게 와인의 신이 됐을까요. 그의 모친은 테바이의 왕 카드모스의 딸인 아름다운 인간 여인 세멜레(Semele). 그녀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디오니소스랍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세멜레가 제우스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그녀를 파멸시키려고 세멜레가 어릴때 친하게 지낸 유모로 둔갑해 접근합니다. 그리고 헤라는 “제우스가 올림포스 주신이라고 사기 치는 것 아니냐. 정말 신이라면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라”며 세멜레를 끊임없이 유혹하죠.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세멜레는 과연 제우스가 신인지 의심하기 시작했고 결국 제우스에게 “당신이 정말 신이라면 증거를 보여달라”고 재촉합니다.

 

루벤스 ‘세멜레의 죽음’(1640)

 

제우스는 이미 그녀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스틱스 강물에 대고 맹세한 상황. 세밀레가 계속 조르자 제우스는 천둥과 번개에 휩싸인 천상의 갑옷을 입고 나타나지만, 인간 세멜레는 그 휘황찬란한 빛을 감당하지 못해 그만 불에 타 재로 변하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제우스는 세멜레에게 달려가 뱃속에 든 아기를 꺼내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심어 키웠고 신으로 태어난 아기가 바로 디오니소스랍니다. 그는 니사의 요정에게 맡겨져 자라납니다. 하지만, 질투심 많은 헤라는 디오니소스를 그대로 둘 리 없죠.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어 세상을 떠돌게 만들어버립니다. 이렇게 디오니소스는 세상의 여러곳을 여행하며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법을 퍼뜨립니다.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출처=이탈리아관광청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출처=이탈리아관광청

 

◆고대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전파된 인졸리아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서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 아그리젠토(Agrigento)에는 이런 그리스신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리스는 기원전 8세기부터 시칠리아에 여러 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아그리젠토는 그리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으로 BC 406년 인구는 20만명에서 최대 80만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에는 그리스 보다 더 원형이 잘 보존된 신전들이 즐비합니다. 기원전 5세기 중반에 고대 도리아식으로 지은 헤라 라치니아 신전과 조화·화합의 여신 콘코르디아 신전이 유명하고 영웅 헤라클레스,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등도 있어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이탈리아 여행 계획이 있다면 시칠리아 아그리젠토에 꼭 가봐야 하는 이유랍니다.

 

아그리젠토 신전의 계곡. 출처=이탈리아관광청

 

이탈리아 와인 지도 출처=와인폴리

 

그리스 와인의 역사는 4500년이 넘고 토착품종만 350종이 넘는데 지금도 매일 새로운 품종이 발견돼 그리스는 ‘포도 품종의 쥬라기 공원’으로 불린답니다. 디오니소스와 그의 후예 그리스 상인들을 따라 그리스의 여러 포도 품종들이 시칠리아를 거쳐 로마, 토스카나, 사르데냐를 통해 남프랑스와 스페인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갑니다. 시칠리아는 토착품종들이 많습니다. 레드 품종 네렐로 마스칼레제(Nerello Mascalese, 네렐로 카푸치오(Nerello Cappuccio)가 유명하고 화이트는 인졸리아(Inzolia), 그릴로(Grillo), 에트나 비앙코(Etna Bianco), 지비보(Zibibbo)가 대표 품종입니다. 그리스에서 전파된 품종도 보이는데 그레카니코(Grecanico)는 이름 자체가 ‘그리스’란 뜻입니다.

 

안소니카

인졸리아는 와인을 많이 마셔본 이들에게도 아주 생소한 품종입니다. 국내에서 거의 찾기 힘든 와인이기 때문이죠. 인졸리아는 그리스 유적이 가득한 아그리젠토를 비롯해 팔레르모(Palermo), 트라파니(Trapani) 등 시칠리아 서부에서 주로 자라 시칠리아가 고향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고대 그리스가 고향입니다. 기원전 8∼7세기 그리스 상인들이 전파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유전자 분석결과 그리스 펠로폰네소스가 고향인 로디티스(Roditis)와 유사한 것으로 밝혀져 로디티스가 시칠리아로 건너가 지금의 인졸리아가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로디티스는 복합미가 뛰어난 풀바디 와인으로 빚어지며 사과, 배, 멜론 등 과일향과 꿀향이 느껴집니다. 안소니카는 레몬 등 감귤류에서 배, 멜론 등 열대과일과 캐모마일 같은 허브 노트, 짭조름한 미네랄이 도드라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두 품종 모두 아몬드 같은 도드라진 견과류향을 공통적으로 지녔다는 점입니다. 인졸리아는 여기에 헤이즐넛이 더해지고 화이트 품종치고는 탄닌이 매우 높아 로디티스처럼 풀바디 와인으로 빚어집니다. 버섯 리조또, 가벼운 파스타 요리와 연어, 갑각류, 버터를 바른 찜 조개 등 모든 해산물과 잘 어울립니다. 인졸리아는 그릴로, 카타라토(Catarratto) 품종과 함께 시칠리아의 주정강화와인 마르살라(Marsala)에 주로 쓰이는 품종이기도 합니다.

 

질리오섬 포도밭

 

질리오 섬 포도밭

◆토스카나 질리오섬에 꽃핀 비비 그라츠 안소니카

 

인졸리아를 토스카나에선 안소니카(Ansonica)로 부르며 안솔리카(Ansolica), 안소니카(Ansonica), 안소라(Ansora), 안조니카(Anzonica)도 모두 같은 품종입니다. 모래가 많은 토양을 좋아해 주로 수퍼투스칸의 고향 볼게리 등 해안 지역에서 자라는데 그중 한 곳이 2500년의 와인 양조 역사를 지닌 아주 작은 섬 질리오(Giglio)랍니다. 이 섬에서 생산되는 와인에 ‘안소니카 질리오’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안소니카가 유명합니다. 이런 질리오에서 안소니카 품종을 최고의 화이트 와인으로 키워낸 인물이 수퍼투스칸 꼴로레(Colore)와 테스타마타(Testamatta)를 생산하는 비비 그라츠(Bibi Graetz)입니다.

 

질리오섬에서 포도 수확하는 비비 그라츠

 

그는 질리오 섬의 안소니카의 잠재력에 반해 2000년 해발 고도 500m의 가파른 절벽의 테라스 형태 포도밭을 매입했으며 100년이 넘는 수령의 안소니카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섬이 작아 포도밭 전체 면적이 20ha에 불과하며 비비 그라츠는 8ha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비비 그라츠는 “한시간동안 배를 타고 들어가는 질리오섬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한 태양이 내려 쬐고 비는 거의 오지 않는 곳이랍니다. 포도밭을 매입할때 연로한 생산자들이 안소니카를 주로 재배하고 있었죠. 아주 적은양의 포도밭을 갖고 가내수공업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섬사람들이 와인을 굉장히 좋아해요. 아침 6∼8시에 와인 마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에요. 거의 질리오 섬 안에서 소비되던 와인이랍니다.” 라고 말합니다.

 

스코페토

 

스코페토

최근 수입사 와이넬이 주최한 비비 그라츠 2020 빈티지 소개 행사에선 질리오 섬의 안소니카 품종으로 빚는 와인이 소개돼 눈길을 끌었습니다. 새로 수입되기 시작한 스코페토(Scopeto)로 비비 그라츠가 만든 대중적인 안소니카 와인입니다. 스코페토 2020 빈티지는 안소니카 70%에 베르멘티노 30%를 섞어 만들었는데 2021년부터는 안소니카 100%로 빚고 있습니다. 2020 빈티지는 베르멘티노의 과일향과 안소니카의 볼륨감이 어우러집니다. 2021은 안소니카로 빚은 만큼 고소한 견과류향이 더 강해지고 바디감이 더욱 묵직해 졌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눈을 감고 잔을 흔들면 바닷가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솔티한 미네랄이 돋보입니다. 화가이기도 한 비비 그라츠가 직접 그린 레이블도 돋보입니다. 옐로우그린 컬러의 와인색과 지중해의 푸른 바다색이 어우러지는 산뜻한 색채가 와인을 어서 마셔보라고 유혹하네요.

 

테스타마타 비앙코

 

테스타마타 비앙코

테스타마타 비앙코(Testamatta Bianco)는 100년이 넘는 올드바인 안소니카만 사용해 집중도와 볼륨감이 더욱 극대화 된 와인입니다. 프렌치 오크 배럴에서 발효 및 숙성을 거치고 죽은 효모와 함께 숙성시키는 쉬르리(Surlees)를 통해 구조감과 바디감을 키워 장기 숙성이 가능합니다. 잘 익은 사과, 복숭아, 멜론 등 농축된 과일 아로마와 함께 멘솔, 재스민 등 허브향이 돋보이고 잔을 흔들면 꿀의 달콤함과 허니서클(인동덩굴)도 피어오릅니다. 특히 짭조름한 바다 미네랄이 도드라질 정도로 질리오 섬의 떼루아가 잘 담긴 수작으로 평가됩니다. 2016년이 첫 빈티지로 연간 700병만 생산합니다. 해산물 요리, 리조또, 튀김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비비 그라츠 화이트 와인

 

까사마타 비앙코

까사마타 비앙코(Casamatta Bianco)는 베르멘티노 60%, 트레비아노 30%, 모스카토 10%를 블렌딩하다 2019년부터 모스카토를 안소니카를 대체해 더욱 볼륨감 있게 만들었습니다. 베르멘티노와 트레비아노는 이탈리아 최고의 지중해 휴양지인 토스카나 남부의 카팔비오(Capalbio)와 아르제나타리오(Argenatario) 사이의 빈야드에서 손수확한 포도를 사용합니다. 베르멘티노의 좋은 산도와 트레비아노의 밸런스, 안소니카의 바디감이 잘 어우러집니다. 오렌지, 복숭아의 과일향과 민트, 재스민의 허브 아로마에 하얀꽃의 이미지가 더집니다. 산도가 아주 신선해 생선회, 스시, 카르파치오, 올리브오일 파스, 소프트 치즈와 좋은 궁합을 보입니다.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에서 2주간 발효해 3개월 동안 숙성합니다. 까사마타는 크레이지 하우스(Crazy House)란 뜻으로 ‘크레이지 헤드’란 뜻의 테스타마타의 정체정을 그대로 잇고 있습니다.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