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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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국회 잠식하는 자기검열

“검열 들어옵니다. 이런 건 몰래 말해주세요.”

“메신저도 털릴 수 있으니까 다들 조심하자고요.”

정치부 박지원 기자

어느 시절이라고 달랐겠느냐마는 국회 안 사람들에게 요즘만큼 손가락 단속, 입단속이 중요했던 때가 있었나 싶다. 최근 국회 보좌진들과 대화하다 보면 “여차하면 우리도 언제든 수사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농담이 부쩍 늘었다. ‘ㅋㅋㅋ’로 도배된 답변 메시지들은 일견 장난처럼 보이지만 뼈가 있다. 가벼이 넘기기 어려운 진심 어린 공포감이 서려 있어서다.

특히 전방위적 검찰 수사의 타깃이 되고 있는 야당 보좌진들 사이에선 일종의 자기검열 분위기마저 생겨나고 있다. 학생의 풍자그림을 정치권의 어른들이 집중 타격한 ‘윤석열차’ 사건부터 대통령 부부 풍자 작품들이 포함된 전시회가 개막 당일 새벽 국회에서 기습 철거된 일까지 새 정부 출범 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국회 안에서부터 표현의 자유를 소리 없이 앗아가는 중이다. 한 야당 의원실 비서관은 머리숱이 적다는 이야기가 있는 장관에게 ‘반짝반짝’이란 수식어를 붙였다간 10억원짜리 손해배상소송 청구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또 다른 의원실 비서관은 대화방에서 대통령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어 보이는 키워드가 나올 때마다 장난스러운 ‘경고장’을 날리곤 한다.

보다 진지한 긴장감도 존재한다.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던 적이 있거나 대통령 부부 관련 논란에 비판 목소리를 냈던 의원실의 보좌진들은 “언제든 의원실 압수수색이 들어오지는 않으려나 매일 걱정하며 파일들을 철저히 정리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정권 초기라고는 하지만 대통령을 향한 비판에 엄격히 대처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대척점에 서 있는 야당 보좌진들부터 혹여나 책 잡힐까 조심하는 것이다.

여권이라고 다르진 않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노골적인 ‘친윤’ 충성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여당에서도 권력을 향한 풍자나 비판의 목소리는 나오기 어렵다. 조용한 공포에 젖은 야권의 분위기를 전해 들은 한 여당 의원실 보좌진은 “여기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대통령 비판은) 큰일 날 소리”라고 말했다. 지난 25일 전당대회 불출마를 선언한 나경원 전 의원이 입장문에서 “질서정연한 무기력함보다는 무질서한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긴 것도 이 같은 여당 내부 분위기를 겨냥한 뼈 있는 조언이었으리라.

때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서울 때가 있다. 자기검열도 마찬가지다. 당장 이 한 번의 풍자나 해학이 검찰 수사나 압수수색으로 이어질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것, 메시지를 쓰기 전에 한 번 멈칫하게 되는 것, 문제가 되진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개개인의 내부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들과 그 작은 억압에 대한 공포감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조금씩 좀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4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황제가 있는데 아무도 그에게 말을 할 수 없다면 이는 곧 ‘거리(Distance)의 독재’를 만드는 것이다. 비판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일이 잘되게 도와주므로, 그들이 자유롭게 말하게 하라.”


정치부 박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