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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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엔 태양광·에어컨 대신 칠드빔… 곳곳에 에너지 전략 접목 [심층기획-‘환경 우등생’ 캘리포니아를 가다]

(4회) 메리 니콜스 캠퍼스엔 특별한 게 있다

축구장 5배 美최대 제로에너지 빌딩
폴크스바겐 디젤게이트 합의금 활용
세계 최고 車 배기가스 실험실 갖춰
모든 실험, 오염원 배출 감소에 초점
빅데이터 구축… 대기정책 수립 활용

옥상·주차장에 1만9000㎡ 태양광시스템
1년에 전기차로 지구 102번 돌 전력 생산
나무 한그루도 대기오염 적은 種으로 심고
외부 공용공간 ‘기후변화 영향’ 관련 작품
“건물 자체 지역 대기정책 방향·목표 투영”

축구장 다섯 배(약 3만7300㎡)만 한 건물이 외부 전력 없이 스스로 만든 재생에너지만으로 ‘에너지 자립’을 할 수 있을까.

늦가을 태양이 덥지도 춥지도 않게 내리쬐는 11월 초,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리버사이드에 있는 ‘메리 니콜스 캠퍼스’를 찾았다. 낮게 포복 중인 변신 로봇처럼 금속성 소재로 각 잡힌 외관을 두른 이 납작한 건물은 미국에서 가장 큰 ‘제로에너지’(ZNE·Zero-Net Energy) 빌딩이다.

글로벌 정보통신(IT) 기업의 본사 혹은 최첨단 공학 연구소가 어울릴 법한 미래 지향적인 이 건물은 뜻밖에도 머지않아 우리와 결별하게 될 내연기관 자동차의 배기가스 테스트장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 있는 메리 니콜스 캠퍼스 입구

◆2050년에도 주유소가 있을까?

건물 지붕 안쪽으로 20m쯤 걸어 들어와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유리벽 너머 중정 같은 공간에 특이한 주유소가 나타난다. 설치예술가인 제니퍼 앨로라와 기예르모 칼사디야가 공동으로 만든 ‘화석화한 주유소’(Petrified Petrol Station)다. 주유소가 화석화 과정을 거쳐 돌로 변한 것을 표현한 작품으로, 우리의 산업을 일으킨 주역이었으나 이젠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찍힌 화석연료가 진짜 화석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선사시대 유물처럼 보이면서도 어쩐지 소름 돋는 섬뜩함이 느껴진다.

최신식 건물 한가운데 자리한 화석 같은 이 작품은 악화한 공기질과 온난화에 대한 경고와 플러그인 운송 수단과 제로에너지 신산업을 선도하려는 캘리포니아의 야심찬 도전과 비전을 당당히 드러낸다.

미 캘리포니아주 대기자원위원회(CARB)의 새로운 지역본부인 메리 니콜스 캠퍼스는 2021년 9월 완공돼 운영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LA) 전역에 있는 CARB의 7개 지점을 통합한 시설로, 캘리포니아의 혁신적이고 지속 가능한 기후정책의 상징이다. 7만7000㎡의 부지에 1억800만달러(약 1300억원)의 장비를 포함해 총 4억1900만달러(약 51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진보된 차량 배기가스 테스트 및 연구 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CARB는 미국 최초로 배기가스와 스모그 간의 연관성을 규명하고 스모그 전구체인 오염 물질을 줄이기 위해 촉매변환기를 최초 적용하는가 하면, 자동차 온실가스 배출 표준을 정립하는 등 대기오염 제어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연구 성과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CARB가 전 세계 대기환경 정책을 선도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메리 니콜스 UCLA 로스쿨 교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환경변호사인 그는 1972년 이후 약 40년 동안 CARB 위원으로 있으면서 세 번에 걸쳐 의장(1979∼1983년, 2007∼2010년, 2019∼2020년)을 맡았고, 캘리포니아 천연자원부 장관(1993∼2003년)도 역임하며 캘리포니아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휘발유의 납 제거, 오존과 미세입자에 대한 국가 보건표준 제정, 캘리포니아 기후변화 프로그램 토대 마련, 온실가스 저감과 지속 가능한 저탄소 에너지 청사진 수립, 모든 자동차와 트럭의 100% 배출가스 제로화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CARB의 새 심장부에 그의 이름이 붙은 건 이 때문이다.

차량 배기가스 테스트셀 승용차부터 농기계까지 모든 차량을 검사할 수 있는 12개의 시험실

메리 니콜스 캠퍼스는 단순히 자동차 배기가스를 분석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독성 대기오염물질, 미립자 오염 및 온실가스를 포함한 추가적인 이동 오염원의 배출을 줄이기 위한 최첨단 테스트 셀(시험실)과 화학실험실을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CARB 커뮤니케이션실의 대기 전문가인 존 스완턴은 12개의 셀을 일일이 안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캠퍼스에 있는 테스트 셀의 규모와 최첨단 설비는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테스트 셀은 승용차와 오토바이, 트럭, 버스뿐 아니라 잔디 및 정원 장비, 농기계, 오프로드 엔진, 해양 엔진, 대형 중장비 등 사실상 ‘바퀴 달린 모든 것’을 시험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기존의 배출가스 방출 시험 방법뿐 아니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 차세대 차량을 위한 새로운 배출가스 방출도 시험할 수 있고요.”

자동차의 배기가스와 증발가스, 연료 샘플을 분석하는 화학실험실도 구축돼 있다. 첨단 시설이 즐비한 화학실험실은 다양한 기원의 미세먼지와 탄소배출물의 성상을 분석하고, 발생량을 산출한다. 탄소 미세먼지, 이온 미세먼지, 탄소광학, 에어로졸 물리, 휘발성유기화합물(VOCs) 실험실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이 시설들은 자동차 배기가스의 독성과 반응성, 기후변화 영향, 제어 기술의 효능, 청정 연료의 사양 등을 연구하고 다양한 배출원에 대한 빅데이터를 구축하는 곳이다. 이렇게 모인 자료는 대기 정책 수립에 활용된다.

메리 니콜스 캠퍼스는 분산돼 있던 각 지점을 통합해 450명의 인력과 첨단 시설을 집중해 효능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엄격한 심사와 규제 테스트를 통해 운송 수단으로 평가되는 모든 영역에서 제로 또는 제로에 가까운 배출 기술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CARB의 진보적인 전략이 구현되도록 지원하기 위해서다.

최근 CARB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주지사의 공격적인 기후 조치 요구에 따라 화석연료 의존도를 대폭 줄이고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2022년 대비 2045년에 액체연료 사용량은 94%, 화석연료는 86% 감소시켜 대기오염물질 배출과 온실가스 배출량을 각각 71%와 82% 줄이기 위한 전략을 준비 중이다. 캘리포니아가 글로벌 청정에너지 시장의 주요 경쟁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전기자동차와 무공해 트럭 제조와 같은 산업을 육성해 400만개의 녹색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경제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다.

태양광 시스템 메리 니콜스 캠퍼스 주차장 부지와 옥상에 빼곡히 들어선 태양광 패널. CARB 홈페이지

◆지구 102바퀴를 돌 수 있는 전력을 생산

자동차 배출가스를 검사하는 시설은 대부분의 나라에 있다. 한국도 인천에 있는 한국환경공단에서 배출가스를 검사한다.

그러나 ‘메리(니콜스 캠퍼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배기가스 시험장일 뿐 아니라 미국 내 최대 제로에너지 빌딩이기도 하다. 미 그린빌딩협의회가 개발한 친환경건축 인증제도인 ‘리드’(LEED·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의 최고 등급인 플래티넘(Platinum) 인증을 받았고, 에너지 효율과 지속가능성 등을 나타내는 캘리포니아 그린빌딩 표준 코드(CalGreen) 2단계 조건을 충족한다.

이 캠퍼스는 설계를 통해 건물의 에너지 수요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수동적 전략과 에너지 효율적인 시스템과 장비, 깨끗한 재생에너지를 공급하는 능동적 전략을 접목하고 있다.

이색적인 건물 외관만큼이나 건물 내부에도 에너지를 덜 쓰기 위한 전략이 곳곳에 숨어 있다. 평범한 시스템 에어컨처럼 보이는 냉방 장치는 ‘칠드빔’이라고 하는 공조 시스템이다.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칠드빔은 냉매를 이용하는 에어컨과 달리 차가운 물을 통해 공기를 식힌다. 관을 통해 천장으로 시원한 물을 흘려보내면 실내에 있던 따뜻한 공기는 위로 올라가고, 이 공기가 천장을 지나는 차가운 물을 만나 식어서 다시 내려오는 원리다. 유럽과 북미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관련 제품이 개발되고 있다. 공기를 환기할 때도 열 교환기를 사용해 환기되는 공기의 열에너지를 회수하는 전략을 쓴다. 탁하고 후텁지근한 공기를 통째로 밖으로 내보내는 게 아니라 열기는 거둬서 다시 쓰는 것이다.

전체 면적의 41%를 차지하는 사무동은 천장의 채광창을 통해 건물 운영에 필요한 에너지의 15%만 사용하도록 한다. 차량 테스트와 실험실 운영에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데 무려 75%나 절감한다는 뜻이다.

친환경 메시지 예술작품 캠퍼스 안에 있는 ‘화석화된 주유소’. 화석화된 화석연료의 미래를 상징한다

건물 옥상과 주차장에는 태양광이 지붕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약 1만9000㎡ 면적에 들어선 3.5㎿ 용량의 태양광시스템은 연간 620만㎾h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전기자동차를 타고 지구 102바퀴(약 410만㎞) 돌 수 있는 양이다. 생산된 잉여 에너지는 전기차 충전소에 전력을 공급하도록 설계돼 있다.

캠퍼스에 멋을 더하는 나무와 예술 작품도 세심하게 선택됐다. 식물은 피톤치드 같은 식물유래 휘발성유기화합물(BVOC)을 내뿜는데, BVOC는 대기 중에서 여러 산화·중합 반응을 거쳐 미세먼지 전구물질인 2차 유기 에어로졸을 만든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캠퍼스에는 BVOC 배출이 적은 나무가 주로 식재됐고, 캠퍼스의 실내외 공용 공간에는 기후변화, 대기질, 환경위험, 형평성 및 인간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6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 설치돼 있었다. 화석화한 주유소도 그중 하나다.

건물 정문 바로 바깥에는 토마스 사라세노의 기하학적 설치 미술작품인 ‘숨의 공간적 메아리(Spatial Echoes of Breath)’가 공중에 걸려 있는데, 이는 거울에 비친 공기 분자가 환경의 위기 상태를 반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가로 3.7m, 세로 26m 벽면을 가득 채운 노에 몬테스의 ‘파라다이스’는 다양한 인종, 연령, 성별의 초상화를 담고 있는데 인간 사회와 지구 환경을 함께 고민하는 환경정의 메시지를 시각화했다. 캘리포니아 대기 정책 방향과 목표를 투영해 미래를 준비 중이라는 걸 건물 전체가 웅변하는 듯하다.

이 캠퍼스를 짓는 데는 폴크스바겐의 디젤게이트 합의금이 활용됐다. 총 건축비 4억1900만달러 중 1억5400만달러(37%)가 폴크스바겐이 낸 벌금에서 나왔다. 대기를 더럽힌 배출자에게 기금을 걷어 환경오염을 최소화한 제로에너지 빌딩을 짓고, 그 안에서 내연기관차 퇴출과 100% 무공해 자동차로 가는 길을 닦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기획됐나

 

<‘환경 우등생’ 캘리포니아를 가다>는 미 국무부 학술교류 지원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2019년 미 국무부가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공모한 ‘굿 거버넌스’ 주제의 연구 프로젝트에서 미세먼지 기획이 선정됐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미국 현지 취재는 무기한 연기할 수밖에 없었고 3년 만인 2022년 기후변화를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주제로 프로젝트를 재개했다.

 

프로젝트를 함께한 임정근 대학ESG실천포럼 공동의장과 류희욱 숭실대 교수(화학공학), 박숙현 지속가능시스템연구소 소장과 세계일보 윤지로 기자가 필자로 참여한다. 주한 미대사관에 이번 프로젝트를 지원한 임 의장은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발전에 관한 전문가로, 특히 지속가능한 사회와 생태를 성취할 수 있는 글로벌 거버넌스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 류 교수는 현재 한국냄새환경학회장과 스마트안전보건환경융합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악취 및 대기오염 배출시설 저감기술을 30년 동안 연구해왔다. 박 소장은 환경정책을 전공하고, 연구소를 운영하며 대학에서 환경정책, 지속가능발전, 환경거버넌스를 가르치고 있다.


리버사이드=글·사진 류희욱 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