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설왕설래] ‘애물가마솥’의 징비(懲毖)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 아닐지라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두려는 건 인간의 속성이다. 사회적 동물답게 더 높은 지위에 올라 이름을 남기려고 애를 쓴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말해준다. 대중의 관심을 자양분 삼아 사는 정치인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저명(著名)이든, 오명(汚名)이든, 허명(虛名)이든. 언론에 부음기사만 아니라면 어떤 이름이든지 나오는 게 좋다고 말하는 이들이 정치인이다.

국회의원 300명 중에 몇이나 신문과 방송에 이름이 올려질까. 두 자리 숫자 정도일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좀 있다는 식자층에게도 낯선 이름이 부지기수다. 여의도 정치인이 그럴진대 지자체장들이야 오죽할까. 그나마 광역단체장은 잠재적 대권주자로까지 대우받는 전국구급이다.

전국 266개 시군구의 지자체장은 중앙 언론에 이름 한번 내밀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치세의 업적을 세워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풀뿌리 정치세계라고 예외일 순 없다. ‘무명씨’로 남고자 정치를 하는 게 아닌 이상 책할 일은 아니다. 그 혜택이 지자체의 발전으로 이어져 주민들에게 돌아간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전남 함평군 나비축제, 충남 보령군 머드축제, 강원 화천군 산천어축제니 하는 세계적인 볼거리가 모두 그 덕이다. 다만 지나친 경쟁이 전국 곳곳에 출렁다리를 놓아 국민들 가슴을 철렁이게 해서 문제이지.

최근 충북 괴산군이 43t 무게의 초대형 가마솥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03년 김문배 전 군수 제안과 군비와 군민 성금 5억원 투입으로 여덟 번의 실패 끝에 만들어져 2005년 7월 공개됐다. 주민 화합을 도모하고 지역 홍보물로 남기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기네스북 등재는 호주의 대형 질그릇이 이미 올려져 있어 무산됐다. 밥을 지었더니 내부의 큰 온도차로 삼층밥이 되고 말았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취지가 무색하다. 2007년부터 방치된 ‘애물가마솥’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했더니 비용만 2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기록을 징비록(懲毖錄)으로 남겼다. 지난 일을 경계(懲)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毖)하기 위해서다. ‘애물가마솥’이야말로 지자체장과 정치인들에게 괴산군이 남긴 징비록이다.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