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그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16일 오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현장이었던 1호선 중앙로역. 3·4번 출입구를 내려가 지하 2층 동편에 이르자 ‘기억공간’이란 안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사고 당시의 현장을 보존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취지로 만든 장소다. 대구시가 2015년 참사 12주기에 맞춰 국민 성금 5억2000만원을 들여 조성한 기억공간에는 참사 당시 희생자 192명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추모벽을 설치했다. 추모벽 뒤편에는 화염으로 녹아 버린 자물쇠와 공중전화기, 새까맣게 그을린 벽, 그 위에 남겨진 희생자 유족이 적어둔 메시지 등 당시 현장을 보존한 ‘통곡의 벽’이 있다.
시민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메시지와 하얀 국화를 남기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직장인 이미정(40·여)씨는 “(이곳에 올 때마다) 굉장히 안타깝고 슬프다는 느낌이 든다”며 “(이런 사고는) 다시는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92명이 숨지고 151명이 부상당해 전 세계 지하철 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18일로 발생 20년을 맞는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2003년 2월18일 처지를 비관한 방화범이 특별한 이유 없이 지하철에 불을 질러 발생했다. 승객 안전은 제쳐놓고 자신들만 대피한 지하철 기관사들의 무책임이 겹쳐 빚어낸 초대형 재난으로 남아 있다.
◆20년 지난 상흔의 기억들 “아직도 그날의 악몽이 생생”
지하철 화재 참사로 아내(당시 38세)와 딸(8)을 잃었던 전재영 전 2·18 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살이 떨린다”고 회상했다. 퇴직 후 경북 김천시에 사는 그는 “당시 아내가 딸의 언어치료를 위해 함께 기차를 타고 대구역에 도착해 다시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이동하다 변을 당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화재 참사 부상자들은 당시 고열과 유독가스에 노출되는 바람에 아직도 호흡 곤란, 성대 손상, 목 통증 등을 호소하고 있다. 참사 부상자가족대책위원회에 따르면 부상자 151명 가운데 20명은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다 끝내 숨졌다. 생존한 부상자 131명 중 60여명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 중 20여명은 정기적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중증 후두협착이나 성대 손상 환자들이다. 이모(당시 17세)씨는 “쉰 목소리를 바로잡기 위해 2009년까지 네 차례나 수술받았다”고 했다. 나머지 부상자도 90% 이상이 정신 질환을 앓다가 가정이 와해되거나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환자 대부분은 경제난으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통증 완화제 등 약물에만 의존하고 있다.
화재 참사 20년을 맞아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시민들이 처음으로 2·18 지하철참사 추모위원회를 발족하고 진상 규명과 제대로 된 추모사업을 대구시에 촉구하고 나섰다.
◆참사 후 전국 지하철 내장재 방염 처리와 안전 강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있고 나서 대구를 포함해 전국 지하철의 객차 내장재는 모두 방염 처리됐다. 대구시는 2003∼2013년 501억원을 들여 전동차 출입문 열림 장치, 통신 장치, 객차 내·외부를 살펴볼 수 있는 폐쇄회로 장치 등을 대폭 강화했다. 객차 내 화재감지기, 감시 모니터 등 화재 탐지 설비를 설치한 데 이어 화재 때 비상 대응 계획과 현장 조처 매뉴얼도 만들었다. 정전에 대비해 4시간 이상 발광하는 야광 타일도 설치했다. 시는 2015년 4월 승무원 없는 자동운전 방식의 국내 첫 모노레일(지하철 3호선)을 도입하면서 유독가스를 바깥으로 내보내는 배기팬을 차량마다 2곳씩 설치했다. 정전에도 30분 이상 작동한다.
서울과 부산·인천·광주·대전 등 5개 지방자치단체도 지하철 화재 대응을 위한 안전장치를 강화하고 나섰다. 대전시는 지하철 1호선에 인공지능(AI) 기술을 이용, 화재 시 긴급 대피를 돕는 안내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 시스템은 역사 내 30여개의 사물인터넷(IoT) 센서가 온도와 일산화탄소, 연기 농도에 따라 화재 위험성을 평가한 뒤, 대피로 정보를 천정에 설치한 20개 모니터에 표출한다.
대구지하철노동조합 관계자는 “(전국 지하철이) 참사 이후 시설은 많이 개선됐지만, 지금도 당시처럼 기관사 한 명만 탑승하고 있다”며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시설이 작동하지 않을 때 대비한 인력 확보 등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술 고도화에도 끊이지 않는 지하철 화재
약 50명의 부상자를 낸 2012년 부산지하철 1호선 전동차 화재, 2014년 대전지하철 시청역사 화재, 지난해 서울지하철 5호선 하남풍산역 화재 등 지하철 화재 사고는 기술 고도화 등으로 차츰 줄어드는 추세지만, 2003년 이후에도 10건의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하는 등 끊이지는 않고 있다. 화재 등 대형 재난은 조금씩 다른 듯한 모습을 띠지만 위험 요소를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고, 발생 이후에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현장 통제 능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안전 점검과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시설물 관리자는 위험이 발생할 확률을 높였다. 대구 지하철 화재는 부실한 소방 및 환풍 시설과 제대로 된 사고 대응 매뉴얼도 없이 우왕좌왕한 지하철 당국의 안일한 대처가 피해를 키웠다. 여기에다 소방과 경찰, 지자체 등의 공조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만한 재난 관리 시스템이 흔들리면서 사고 발생 시 구조와 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역시 문제였다.
강동필 영남대 사회교육원 교수(행정학과)는 “재난관리는 중앙정부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만큼 각 지자체가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지자체도 재난을 예방, 관리할 수 있도록 전문 인력 양성과 장비 등을 확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원화 경북대 총장 “잊을만 할 때 다시 돌아오는 것이 재난… 기록으로 남겨 재발방지 자료 삼아야”
“재난은 재난에서 배워야 합니다. 과거 재난 사례에서 발생했던 문제점을 바탕으로 적절한 대응 방법을 찾는 것만이 재난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길이죠.”
홍원화 경북대학교 총장은 지난 16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비롯해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대형 참사는 발생 이후 세부적인 기록과 보존·분석을 통해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도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재난을 반복할 뿐”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홍 총장의 세부 전공 분야는 방재다. 그는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당시 민간 전문가로서 사비 4000여만원을 들여 1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각계 전문가 100여명을 인터뷰해 2005년 ‘대구 지하철 참사 백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가 2년간 만난 생존자와 유족만 1000명에 이른다. 홍 총장은 “참사 현장인 중앙로역 비상 시설이 제 기능을 다했는지 살펴보니 고쳐야 할 곳이 너무나 많았다”며 “잊었을 때 다시 돌아오는 것이 재난의 속성이기 때문에 누군가 어떻게든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홍 총장은 백서 발간의 모범 사례 국가로 일본을 꼽았다. 그는 “수많은 자연재해 속에서 안전에 대한 요령을 몸으로 익힌 일본에서는 재난 관련 각종 백서를 시중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우리는 재난의 기록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재난을 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안일한 자세로는 참사를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홍 총장은 “재난을 통해 배운 재난을 잊어버리고 재난을 일으킬 수 있는 시발점을 노출한다면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원인으로 우리가 잊어버린 재난이 재발생하게 된다”며 “사회 전반에 팽배한 안전불감증을 해결하고 재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재난을 예방하고 대응하는 프로세스에 관심을 가져야만 대형 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