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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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안보 위기 현실화… ‘일관된 공급망 관리’ 구축 서둘러야 [심층기획-우크라전쟁 1년과 한국]

입력 : 2023-02-22 06:00:00
수정 : 2023-02-22 0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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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에너지 전쟁 대응 어떻게

2022년 원유 수입액 1060억弗 기록
이란 사태 10년 만에 1000억弗 넘어
석유공사, 2022년 3차례나 비축유 방출
30년 동안 내놓은 양보다 훨씬 많아

“阿 국가 유전 등 개발 통해 지분 확보
印尼·호주로 수입선 다변화 등 필요”
‘국가자원안보 특별법’ 국회서 공전
“유사 법안 3건 병합 심사 서둘러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전 세계 에너지전쟁 위기가 현실화하면서 한국도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원유·가스·석탄 등 전통적인 에너지원뿐만 아니라 리튬·희토류 등 반도체와 배터리 생산의 핵심광물 확보를 위한 자원전쟁으로 확전한 상황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선 국가에 닥칠 위기에 선제 대응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가 절실하다는 지적인데, “국가 차원의 일관된 핵심자원 공급망 관리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이란 사태 10년 만에 1000억달러 원유 수입

2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원유 수입액은 1060억달러(약 137조6000억원)로 전체 수입의 14.5%였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 등에 따른 유가 급등으로 2012년 역대 최고치(1082억달러)를 기록한 이후 1000억달러를 넘어선 건 10년 만이다. 원유 수입액으로 역대 두 번째다. 가스와 석탄 수입은 전년보다 두 배 늘어난 567억달러(7.8%)와 282억달러(3.8%)로, 수입액과 비중 모두 역대 최대다. 지난해 두바이유 가격이 39% 오르고, 액화천연가스(LNG)와 석탄이 각각 128%, 161% 급등한 결과다. 원유·가스·석탄 3대 에너지 수입액은 1년 새 70% 증가한 1908억달러로, 지난해 무역수지가 역대 최악인 472억달러 적자를 기록한 배경이다.

 

자원부국 간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지면서 벌어진 처참한 결과물이다. 에너지안보를 위해 설립된 한국석유공사는 지난해에만 세 차례나 비축유를 방출했는데, 1991년 걸프전 이후 30년간 방출 규모를 크게 넘어섰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곧바로 물가를 끌어올렸고 1·2월 가정에 불어닥친 ‘난방비 폭탄’을 촉발했다.

서울의 한 주유소. 연합뉴스

에너지 수입 성적표를 보면 최악의 결과지만 전문가들은 정부가 최소한의 대비를 한 결과라고 평한다. 송영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한 국제 원자재 가격 변동성 확대는 우리나라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며 “해외 자원 개발 활성화를 통해 안정적 공급망을 구축하고 공급처를 다변화해 예측 불가능한 리스크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했다.

에너지 수요 93%, 광물 수요 95%를 수입에 의존하는 자원빈국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지난 25년간 원유 수입 비중이 한 자릿수였던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한 2020년이 유일하다.

◆전쟁 이전부터 조기경보체계 등 논의 활발

정부는 꽤 오래전부터 에너지전쟁에 대비했다. 1970년대 두 차례 오일쇼크 이후 설립, 1980년 비축사업을 시작한 석유공사는 지난해 말 기준 9개 비축기지에 9660만배럴(111일 비축일수)의 원유를 비축하고 있다. 1983년 설립된 한국가스공사도 수급 안정 등이 목적이다. GS칼텍스 등 정유사들도 자체 비상팀을 꾸려 원유 수급 상황을 정부에 보고하고 대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러 대응 방안을 조언한다.

 

장덕준 국민대 유라시아학과 교수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부터 서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수출을 정치·외교적 영향력 강화 수단으로 활용했다”며 “유럽은 대체에너지를 늘리고 아프리카 알제리, 중동 카타르 등으로 가스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있다. 우리도 인도네시아나 호주로 수입선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강문수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아프리카중동팀장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국가와 장기 계약으로 공급망 안정성을 찾아야 한다”며 “알제리나 이집트 등 아프리카 국가를 상대로 중장기적인 유전·가스전 개발을 통한 지분 확보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러 정책수단을 잘 혼합해 장기적인 정책 프레임을 세우고 미래 자원 수요를 예측·대응할 컨트롤타워가 절실하다.

 

김태헌 에너지경제연구원(KEEI) 석유정책팀장은 “자원안보 정책수단은 비축, 도입선 다변화, 해외 자원 개발 등으로 압축된다”면서도 “안보 정책수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집중 대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경제성장 시절 ‘부족한 자원’에 초점을 맞췄는데 2010년 북미에서 셰일가스가 나온 후 자원 부족 시대는 지났다”며 “오히려 탄소중립 등 여러 정책이 등장, 불안정한 수요로 인한 ‘투자 불확실성’ 탓에 변동성이 더 심해졌다”고 지적했다. 전기차 보급이 늘어 석유 수요가 줄면 정부 비축량은 그대로인데 비축일수가 증가한다는 얘기다. 전통적인 에너지는 물론, 반도체·배터리 산업에 필수인 리튬과 희토류 등의 광물로 확대된 자원전쟁에 종합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정부는 2020년부터 자원안보 대응을 본격화했고 석유·가스는 물론, 광물 공급과 공기업 비상대응 매뉴얼도 갖췄다”면서도 “올겨울은 유럽이 춥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길어지면 고비가 또 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쌍둥이 법안, 또 하나의 법안서 멈춰 선 특별법

문재인정부 시절 본격화한 자원안보 정책은 지난해 8월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에 이어 12월 국민의힘 양금희 의원이 각각 발의한 특별법안에 담겼지만 현재 두 달째 공전 중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야당 간사인 민주당 김한정 의원실에서 유사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 병합 심사를 위해 논의가 중단됐다.

황·양 의원 법안은 내용이 비슷한데, △5년 주기 자원안보기본계획 수립·시행 및 자원안보위원회 설치 △국가자원안보통합정보시스템 구축·운영 △자원안보 조기경보체계 구축 및 공급망 점검·분석 등 대응안이 총망라돼 있다. 대부분 방안의 시행 주체는 산업부 장관이다.

양 의원은 법안 제안 이유로 우크라이나 사태 외에 “반도체·배터리 산업 등 4차 산업에 필수적인 리튬, 니켈 등의 주요 생산국인 멕시코·볼리비아·인도네시아 등은 자국 안보를 위해 에너지와 자원을 무기화하고 있어 우리나라는 자원안보에 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며 “핵심자원에 대한 주요 공급망 확보 및 국가 차원의 신속한 대응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도시가스사업법’, ‘해외자원개발 사업법’ 등에 나뉘어 규정돼 국가 차원의 일관된 공급망 관리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아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법안이 시행돼도 할 일은 태산이다. 법에 명시된 조직 구성은 물론, 구체적인 조기경보체계 등은 시행령으로 규정해야 하고, 비상상황 진단체계와 공기업 대상 실행계획도 구체화해야 한다. 경제안보로 비슷한 사안을 다루는 기획재정부 등과의 협의도 필수다.

자원안보 대응체계 마련에 동참한 한 인사는 “세 법안을 병합 심사하려면 빨라야 여름, 아니면 겨울이 될 수 있고 시행은 통상 입법 6개월 후라서 더 늦어질 것”이라며 “위기가 다시 찾아와도 대응이 미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다른 인사는 “정부와 여야를 불문하고 국가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데 필수인 법안 시행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