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을 지나 지리산 청학동 마을 가는 길목인 경남 하동군 횡천면에 다다르면 귀농인 박철경 대표농부가 운영하는 ‘열대정글 농장’이 나온다. 2월 24일 찾은 박 대표농부의 농장 비닐하우스 안은 섭씨 7∼15℃ 정도로 초여름 기온이었다. 반팔을 입어도 될 정도로 후끈했다. 비닐하우스에는 바나나를 비롯해 구아바, 라임, 레몬, 자색 아스파라거스 등 동남아에서 자라는 열대 작물들이 울창한 나무숲을 이루고 있었다. 어떤 나무는 꽃을 피우고, 어떤 나무는 열매를 맺는 등 4계절을 한눈에 볼 수 있어 마치 베트남이나 필리핀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날 박 대표농부는 라임 나무 접붙이기에 구슬땀을 흘렸다. 비닐하우스에는 3년간 자란 무릎 높이 크기의 탱자나무 묘목이 너비 2m, 길이 50m의 이랑에 파릇파릇하게 자라고 있다. 이런 이랑은 옆으로 5개나 더 있다. 박 대표농부는 이랑 사이의 좁은 고랑에 앉아 탱자나무를 한뼘 높이에서 전지로 잘라내고 가장자리에 칼집을 냈다. 2m크기의 라임 가지를 10cm정도로 잘라 칼집으로 생긴 틈에 끼워넣었다. 그리고 하얀색 테이프로 삽입한 라인 나무 가지가 탱자나무에 잘 붙도록 다섯바퀴 정도 감아줬다.
“탱자나무는 병충해에 매우 강해요” 박 대표농부는 라임 나무 접붙이기용으로 탱자나무를 쓰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라임 나무를 삽목이나 씨를 뿌려 키워도 봤지만 병충해에 약해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대표농부가 하루 접붙이기를 할 수 있는 나무는 300여 묘목이다. 비닐하우스 5개 이랑의 접붙이기를 마치려면 3개월 이상이 걸린다. 아무리 힘들어도 접붙이기 작업만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 그의 라임 농사 성공비결이 묘목 접붙이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날 접붙이기한 라임 나무는 1∼2년을 더 키워야 묘목이 된다. 이 묘목이 수확할 정도로 열매를 맺려면 2∼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박 대표농부는 국내 열대 작물의 선두주자다. 그의 10동 비닐하우스에는 열대 작물만 300여종이 재배되고 있다. 우리나라 열대 작물의 보고다. 국내에서 열대 작물을 재배하거나 연구하려면 박 대표농부의 농장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할 정도다. 그의 비닐하우스에는 ‘국내 유일’ 타이틀을 단 열대 작물만 10여종에 이른다.
박 대표농부는 8년차 귀농인이다. 그는 호텔의 식품부에서 일했다. 호텔 일을 그만두고 식품관련 자영업을 했지만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한파를 넘지 못하고 부도가 났다. 빚에 몰린 그를 보듬어 준 것은 고향의 부모였다. 박 대표농부는 귀농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벼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9900㎡(3000평) 논농사의 한 해 수입은 3000만원에 불과했다. “이런 벼농사 수입으로는 빚은 커녕 생계유지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그 때 그의 머리속 떠오른 것이 호텔에서 근무할 때 눈여겨 본 열대 작물이다. 레몬과 라임의 국내 소비량 가운데 국내 생산은 2%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향후 희소성과 가격면에서 경쟁력만큼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막연한 아이디어 하나로 그는 열대 작물의 불모지인 하동에서 귀농의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열대 작물의 재배는 그의 결심처럼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열대 작물의 정보가 거의 없었다. 열대 작물의 묘종이나 묘목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인터넷의 동호인 카페에 가입해 귀동냥이라도 할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열대 묘목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한 그루라도 구해왔죠” 그는 부지런히 열대 작물의 모종과 묘목을 찾아다녔다. 국내에서 열대 작물 재배 방법을 배우기는 쉽지않았다. 해외로 눈을 돌렸다. 열대작물의 원산지인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으로 떠났다. 베트남에서 열대 작물을 공부하면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2019년 겨울 하동으로 시집온 아내의 ‘지도’로 박 대표농부의 비닐하우스는 제자리를 잡아갔다. “아내는 물을 얼만큼 주고, 온도를 몇도에 맞추고, 수확은 언제 하는지를 감각적으로 알고 있죠” 아내의 지도를 받으면서 하동지역에 가장 맞는 열대 품종이 어떤 것인지 시험 재배를 했다. 초기엔 다양한 라임과 레몬 품종을 비교해 심어보고 병충해 정도와 수확량 등을 조사했다. 비닐하우스는 열대 작물의 시범포가 됐다.
지난해 그는 열대 작물 재배로 연간 1억50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는 2억원 정도, 내년에는 3억원 예상하고 있다. 열대 작물은 국내에서 비싸게 판매된다. 핑거라임은 냉동 수입산이 1㎏당 20만원대에 팔린다. 국내에서 생산된 라임 생과의 가격은 이보다 더 비싸다.
박 대표농부는 2100㎡에 5년전부터 심기 시작한 체리농사에 기대를 걸고 있다. 6개 농장에 지금까지 1200주를 심었다. 체리 수확은 식재 후 4∼5년이 돼야 한다. 올해는 2∼3톤 수확을 예상하고 있다. 판매 수익은 5000만원이 넘는다.
판로도 큰 걱정이 없다. 아열대 작물 재배 농가가 많지않아 농가들끼리 경쟁을 하지않아도 된다. 열대 과일은 로컬 푸드는 물론 전국 농특산물 시장에서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귀한 작물’이다. 열대 작물의 또다른 수요처는 국내 다문화 가정이다. 50만 가구에 이르는 다문화 가정에서 열대 작물은 식탁의 필수품이다.
그의 바람은 열대 작물 체험 농장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동안 배운 열대 작물의 재배법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열대 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체험 공간이 필요하다”는 박대표농부는 “정부나 지자체가 공간을 제공하면 임대해서라도 체험농장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박 대표농부는 예비귀농인이나 귀농인들에게 열대 작물을 적극 추천했다. 어느 작물보다 경쟁력이
높다는 것이다. 레몬과 라임 등 열대 작물의 경우 국내 소비량의 98%를 수입하고 있다. 국산은 2%에 불과해 국산 소비량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는 게 박대표농부의 전망이다. 박 대표농부는 귀농인의 작물 재배 성공 요건으로 땅(토지)과 재배 작물을 꼽았다. 체리의 재배조건은 저온건조다. 땅은 건조하고 습기는 적어야 한다는 의미다. 때문에 고온다습한 우리나라 논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체리를 재배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박 대표농부는 귀농 전에 반드시 귀농귀촌센터에서 사전 준비를 해야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어떤 이유로 귀농을 결심했던지 상관없이 귀농후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반드시 센터에서 알아본 것이 귀농성공 여부를 가른다”고 강조했다.
귀농 전에는 미리 농지를 사거나 거주할 집을 짓지 말라는 게 그의 귀농 제 1원칙이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귀농할 지역에서 수개월간 살면서 동네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필요한 만큼 땅을 사거나 거주할 공간을 마련해야 실패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