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아재’라는 사실 말이다. 원작 대사까지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외우고 있으면서도, 스크린 위로 그때 그 명장면이 재현될 때면 코끝이 찡했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온 ‘더 퍼스트 슬램덩크’ 얘기다.
슬램덩크와 농구대잔치 열풍이 겹친 1990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다. 돌아보니 농구와 얽힌 추억이 많다. 중학생 때 학교 친구들과 참가한 구청장배 농구 대회나 티끌 같은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샀던 나이키 농구화가 먼저 떠오른다. 대회는 첫 경기 만에 탈락했고, 신줏단지처럼 모셨던 농구화는 바닥이 닳아 진즉에 버렸다.
대학 새내기 때는 농구 동아리를 만든 적도 있다. 중앙동아리를 하기엔 실력도 숫기도 부족했던 우리였기에, 같은 학과 대여섯 명을 조촐하게 모았다. 꼴에 구색을 갖추려고 애썼는데, 유니폼을 맞춘 것도 그 일환이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뒤 처음 가 본 동대문시장은 신기하기만 했다.
동아리 결성을 주도한 선배는 엉뚱하게도 매니저 영입에 매달렸다. 몇몇 여자 후배에게 제의했다가 이미 거절을 당한 눈치였다. ‘여자 매니저’는 당시 우리가 보고 자란 스포츠 만화의 공식 같은 존재였다. 남성 캐릭터들이 치열하게 승부를 다툴 때, 여성 캐릭터들은 경기장 밖에 서 있었다. 대개 이들은 남성 캐릭터로부터 구애를 받거나 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주변적 존재였다.
슬램덩크 또한 이 구태의연한 공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동시대 만화들과 비교하면 여성 캐릭터의 존재감이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동일 선상에 놓긴 어렵다. 극 중 여성 캐릭터들은 주인공 강백호에게 농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극장판 영화에서는 반전을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만드는 장면도 새롭게 담겼다.
한동안 손에서 놓았던 농구공을 다시 잡은 것은 3년 전이었다. 전설적인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을 다룬 다큐멘터리 ‘라스트 댄스’가 공개된 직후였다. 온라인을 통해 동네 인근에 있는 동호회에 들어갔는데, 40~50명의 회원 중에 시간이 맞는 사람들이 그때그때 나와 경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신선했던 것은 여성 회원이 꽤 있었다는 점이다. 매니저는 아니었다. 실력은 저마다 천차만별이었지만 진지하게 농구를 하고 싶어 모인 사람들이었다. 경기 사이 쉬는 시간, 코트 구석에서 드리블이나 슛을 연습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운동은 보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게 더 즐겁다.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일 터인데, 굳이 조연을 자처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비단 농구만의 얘기도 아니다. 여자 축구를 다룬 예능 프로그램인 SBS의 ‘골 때리는 그녀들’은 다음달 1일 네 번째 시즌을 시작한다. 2021년 2월 파일럿 형식으로 첫 방영된 지 2년이 지났다. 지난해에는 연세대와 고려대의 정기 친선경기대회인 ‘연고전(고연전)’에 최초로 여자 축구가 정식 종목으로 포함됐다. 연고전의 기원은 1925년이라고 한다. 관객석에서 경기장 안까지 98년이 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