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소비자가 제조사보다 상대적으로 차체 결함을 입증하기 어려운 점을 들어, 제조사가 먼저 결함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게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 ‘제조물책임법 개정 촉구’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게재 닷새 만에 동의 정족수 5만명을 채우면서 국회 소관위원회로 넘겨져 개정 논의의 길이 열렸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은 홈페이지 등록 후 30일 안에 100명 이내 찬성을 받으면, 그날로부터 1주일 안에 청원 요건 검토 등을 거쳐 적합할 경우 국민동의청원 페이지에서 공개된다. 이어 공개 후 30일 안에 동의 인원 5만명을 달성하면 국회 관련 위원회에 회부된다. 다만, 관련 위원회 심사를 거쳐 정부나 국회의 처리가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청원만 입법 활동의 배경이 될 수 있으며, 법안 반영이 불가능하거나 타당성이 결여됐다고 판단되는 청원은 폐기된다.
지난해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급발진 의심 사고로 열두 살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올린 이 청원의 차량 제조사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대목에 국민들이 빠르게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난 23일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결함 원인 입증책임 전환 청원' 제조물책임법 개정에 관한 청원’에서 이모씨는 “현행 제조물책임법은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차량의 결함이 있음을 비전문가인 운전자나 유가족이 입증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씨는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제조물책임법 조항을 최소한 급발진 의심 사고 시에는 자동차 제조사가 결함이 없음을 입증하도록 그 책임을 전환하는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청원 제기 배경을 설명했다.
사고는 지난해 12월 오후 3시59분쯤 강원 강릉 홍제동의 한 도로에서 발생했다. 운전자인 이씨의 어머니(당시 68세)가 몰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수로에 빠지면서 운전자가 크게 다쳤고, 차에 타고 있던 이씨의 아들(당시 12세)은 숨졌다. 차가 갑자기 ‘웽’하는 굉음과 함께 굉음과 함께 흰 액체를 분출하며 30초 이상 600m를 주행한 뒤 사고가 발생했으며, 차량 블랙박스에는 운전자가 “아이고, 이게 왜 안돼. 오 큰일 났다”라며 다급하게 외치는 상황이 담겼다.
유족과 변호인 측은 자율주행 레벨2 차량인 이 자동차가 주 컴퓨터 전자제어장치(ECU) 소프트웨어의 결함, 가속제압장치(ASS)를 채택하지 않은 설계 결함, 자동긴급제동장치(AEB)가 작동하지 않은 결함, 충돌을 견디는 능력이 결여된 지붕(루프)을 장착한 설계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급발진 중 운전자가 최소 2차례 충돌회피 운전을 한 점을 들어 페달 오조작 같은 운전자 과실이 아니라 자동차를 통제하며 운전했음을 입증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웽’하는 굉음과 흰 액체의 분출 등도 차량 결함을 의심하게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유족 측은 지난 1월 자동차 제조사의 책임을 묻기 위한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이씨는 청원글에서 “소송을 준비하며 느낀 것은 아들을 떠나보낸 슬픔과 아픔의 고통을 그리고 온전히 애도하지 못한 채 급발진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사고 원인 규명을 비전문가인 사고자나 유가족이 증명해야 한다는 점”이라며 “억울하고 답답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울분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진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계속해서 “급발진 사고로 동일한 아픔을 겪는 국민을 대표해 국회에 호소한다”며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결함 입증책임 전환과 급발진 사고가 더 이상 발생되지 않도록 제조사의 기술적 대책 마련이 반드시 필요하니, 간절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간곡히 부탁드리며 청원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현행 제조물책임법 제3조는 ▲피해자가 제조물을 정상적으로 사용한다고 보이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될 수 있다는 가능성 ▲손해가 해당 제조물의 오작동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피해자’가 증명했을 때, 제조물 공급 당시 해당 제조물에 결함이 있었고 이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한다.
이씨가 제안한 같은 법 개정안은 ‘자동차의 비정상적인 가속에 의한 급발진 사고로 손해가 발생했다고 피해자가 주장하는 경우, 제조사는 피해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결함이 존재하지 않음과 결함에 의해 급발진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는 내용 등을 추가로 포함한다.
이는 관련 소송에서 피해자가 제조물의 결함 등을 입증해야 하지만, 고도의 기술집약적 제품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소비자인 피해자가 이를 입증하기 점점 어려워진다던 국회입법조사처의 수년 전 보고서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2016년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이슈와 논점’은 “소비자 입증책임을 완화해주는 대법원의 판례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급발진 소송 등 사회적 이슈가 되는 구체적인 제조물 책임소송에서 원고가 패소하는 사례가 발생했다”며 “제조물 책임소송에서 결함의 존재와 손해 사이 인과관계에 관한 입증책임을 완화하거나 전환하는 특별 규정을 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언급했다.
보고서는 “제조물 책임소송에서 입증 책임을 완화하거나 전환하는 방안은 소비자 피해 구제 활성화와 제품 안전수준 향상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면서도, 해외 입법례를 찾기 어렵고 소송 남발에 따른 기업 활동의 위축 우려 등을 토대로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