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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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편 아련한 추억들… 다시 재생 버튼 누르다 [밀착취재]

그리운 얼굴 담긴 ‘비디오테이프’ 디지털 변환

12.7㎜의 자기테이프가 초속 2∼3㎝의 속도로 움직인다. 회색빛 노이즈가 보이고 잡음이 들리더니, 이내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흔히 비디오테이프라고 부르는 VHS(Video Home System)는 1976년 9월, JVC사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됐다. 방송국 등 산업 영역에서 주로 사용되다가 1990년대 비디오 대여점이 성행하면서 가정마다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할 수 있는 기기가 보급됐다.

각 지역에서 고객들이 보낸 비디오테이프의 모습. ‘사랑하는 우리 아기 민지의 자라는 모습을 이 카메라에 잠깐잠깐 녹화합니다’라고 적힌 테이프가 놓여 있다. 1994년에서 2005년까지 다양한 시기가 기록되어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6㎜, 8㎜ 테이프를 사용해 영상을 직접 촬영할 수 있는 비디오카메라가 대중화했다. 그 시절 비디오카메라는 가정의 추억을 담는 특별한 수단이었다. 아이의 성장 과정, 결혼식, 돌잔치, 재롱잔치, 체육대회, 환갑연 등 가정의 행복한 순간들이 테이프에 담겼다.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은 VHS 테이프로 변환됐다. 가족들은 직접 촬영한 영상을 TV 앞에 둘러앉아 함께 웃으며 보았다. 한동안 대중적으로 사용되던 비디오테이프는 CD, DVD 등에 밀리며 하나둘 모습을 감추더니 2016년에 마지막 제조사인 일본의 후나이 전기가 생산을 중단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사라진 비디오테이프를 2023년에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비디오테이프 변환업체 제이시스템이다. 위종석 대표는 5년째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영상을 변환하고 있다. “한학자셨던 아버지가 성균관에서 일을 하셨는데, 그때의 영상이 엄청난 양의 비디오테이프에 담겨 있었어요. 변환하려고 했더니 비용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직접 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기록을 되살리고자 했던 위 대표가 모두의 추억을 재생하게 된 계기다.

고객들이 맡긴 비디오테이프가 바구니에 담겨 있다. ‘행복한 우리집’이라고 적힌 테이프가 눈에 띈다.
위종석 제이시스템 대표가 재생용 방송장비에 6㎜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있다.

고객들이 방문하거나 택배를 통해 소장한 비디오테이프를 보내주면 종류별로 분류해서 각 규격에 맞는 방송장비에 삽입한다. 방송장비와 컴퓨터를 연결한 후 캡처 기능을 이용해 재생되는 비디오를 실시간으로 녹화한다. 실시간 녹화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디오 재생 시간만큼 시간이 걸린다. 캡처 작업이 끝나면 화질 보정 작업을 한다. 녹화된 영상에서 노이즈가 생겨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을 잘라내어 보기 편하게 하는 과정이다. 이후 밝기나 톤, 색감 등을 보기 좋게 보정하면 최종 작업이 끝난다. 데이터는 USB, 이메일 전송 등 고객이 원하는 방식으로 보내고, 원본 비디오테이프 또한 다시 돌려보낸다.

한 번에 보통 5∼10개의 테이프를 맡긴다. 많게는 30∼50개 정도의 비디오테이프를 맡기는 이들도 있다. 결혼식이나 학교 체육대회 등 추억을 담은 테이프가 많다. 병원에서 의학 연구를 위해 과거 초음파 영상이 담긴 테이프를 맡기는 등 업무 목적으로 변환을 의뢰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과거 방송에 출연한 영상을 맡긴 연예인도 있었다.

위종석 제이시스템 대표가 비디오테이프 변환 작업을 하고 있다.
방송장비를 통해 재생되는 비디오테이프들이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녹화되고 있다.

브라운관 텔레비전과 비디오테이프 재생기가 있던 거실, 이제는 비디오테이프 재생기 없이도 스마트TV 하나만으로 다양한 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돌잔치나 재롱잔치가 없는 특별하지 않은 날도 매 순간 촬영되고, 실시간 공유된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동영상을 간편하게 촬영할 수 있는 요즘, 특별한 날만 무거운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가족의 대소사를 촬영하던 그 시절보다 순간의 소중함이 옅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편하게 클리닝액을 떨어트려 비디오 헤드 클리너를 돌려가며 비디오테이프를 보던 추억을 머릿속에서 재생해본다.


글·사진=최상수 기자 kilr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