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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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행정에… 2년 넘게 이동노동자 쉼터 조성 ‘정체’

서울 25개 자치구 중 6곳 설치

市, 연말까지 구마다 1개씩 목표
노원·강서 등 “이용자 부족” 폐쇄
강동구도 5월 문 닫아 갈수록 줄어

“접근성 떨어지는 곳 조성 탓” 지적
의견 청취 뒤 만든 서초구는 북적
市, 예산 대폭 삭감해 설치 ‘불투명’

“이동노동자 쉼터가 생긴 덕에 몸이 편해진 것도 있지만, 마음이 특히 편해졌죠.”

 

20년 가까이 퀵서비스 배달 일을 해온 송모(53)씨는 10년 전만 해도 눈이나 비가 오면 건물 1층 로비로 몸을 피했다. 건물 관리자가 와서 내쫓으면 사람 없는 은행 ATM기 부스를 찾아갔다는 그는 “쉼터를 노동자의 권리로 이용할 수 있으니 쫓겨날 일 없어서 좋다”고 만족해했다.

 

대리기사 정택광(70)씨는 “쉼터가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정씨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대리기사나 배달기사들이 모여 서로 의지하고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면서 “제발 쉼터를 없애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 시내에서 이동하는 이동노동자들. 연합뉴스

‘이동노동자 쉼터’가 송씨나 정씨와 같은 사용자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고 있음에도 서울시의 예산 삭감과 자치구의 탁상행정 등으로 시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시가 ‘이동노동자의 건강권과 휴식권을 보장한다’며 전 자치구에 쉼터를 1개씩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지 2년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19개 자치구에는 쉼터가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1일 서울시와 각 자치구에 따르면 서초구에 위치한 이동노동자 쉼터는 지난해 일평균 66.9명이 이용했을 정도로 수요가 높다. 이동노동자 쉼터란 배달기사와 대리운전기사 등 업무 특성상 오랜 시간 야외에서 대기하지만 정해진 휴게시설이 없는 이동노동자들을 위해 마련된 휴식 공간이다.

 

이용자들은 이동노동자를 위한 공간이 주어지는 만큼,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는다. 서울시도 쉼터의 필요성에 동의해, 2020년 ‘제2차 노동정책 기본계획’에서 올해 연말까지 ‘1자치구 1쉼터’를 목표로 서울 총 25개 자치구에 이동노동자 쉼터를 최소 1개소씩 설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동노동자의 건강권과 휴식권을 보장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지난 1월 기준 서울시에 설치된 쉼터는 6개 자치구에 7개소뿐이다.

 

여전히 19개 자치구에는 쉼터가 마련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존에 설치됐던 쉼터마저 폐쇄 위기에 놓여 있다. 2019년 개소한 강동구 쉼터는 오는 5월 폐쇄를 앞두고 있다. 앞서 노원구, 강서구, 도봉구도 쉼터를 설치했다가 폐쇄한 바 있다. 노원구 관계자는 “한 달 평균 방문객이 0명이었다”고 폐쇄 이유를 설명했다. 자치구들은 이처럼 ‘이용자 부족’을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근본적 원인은 애초 부지 선정에서 이용자 편의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노동권익센터에서 쉼터 운영을 총괄하는 이성종 팀장도 쉼터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무엇보다 ‘접근성’이라고 강조했다. 이 팀장은 “최초의 이동노동자 쉼터인 서초구 쉼터는 당시 시장이 직접 대리기사들로부터 의견을 청취해 위치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이후 설립된 쉼터의 일부는 위치가 행정 편의적으로 결정되면서 이용자 수요와는 동떨어진 곳에 지어졌다는 지적이다.

 

서울시는 예산이 문제라는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배달 라이더 등이 이용하는 시설이라 접근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부지를 찾기가 어렵다”면서 “2022년 3개 구가 간이쉼터 설치 사업에 참여 의사를 보였지만, 2개 구는 설치 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캠핑카 형태의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를 지난해 시범 운영했고 올해도 추진 중이다. 다만 관련 예산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서울시 관계자는 덧붙였다. 서울시는 쉼터를 운영하는 서울노동권익센터 예산을 지난해 35억8200만원에서 올해 24억7800만원으로 약 30% 대폭 삭감한 바 있다.


조희연·윤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