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부터 자국 내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을 대상으로 시설투자에 390억달러(50조원) 등 5년간 527억달러(69조원)의 보조금 지원 신청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놓은 지침이 문제가 많아 논란이 일고 있다. 애초 중국을 겨냥한 ‘우려 대상 국가’에 10년간 반도체 시설을 짓거나 추가투자할 수 없다는 ‘가드레일 조항’이 걸림돌이었다. 국내 기업이 중국에서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지 못하게 기술 수준의 제한을 검토하는 것도 걱정거리였다.
반도체 산업의 사이클이 과거보다 짧아지고, 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첨단 분야 수요가 급증해 장비의 신설·업그레이드는 필수다. 중국에서 각각 낸드플래시와 D램 반도체의 40%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런 규제들은 ‘발등의 불’이다. 최악의 경우 공장을 철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 미 상무부가 공개한 보조금 지침은 더 황당하다. 1억5000만달러 이상의 보조금 희망업체는 여성 고용을 늘리기 위해 높은 수준의 보육시설을 설치하도록 했다. 보조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예상치 못한 초과 이윤을 연방정부에 일부 배당해야 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우리 반도체 기업 입장에선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이익을 공유하라는 것도 납득하기 힘들다. 법인세 외에 준조세까지 내는 ‘이중과세’가 아닌가. ‘경영 간섭’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국우선주의가 현실이라지만 이 상태라면 외국기업의 보조금 받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조금으로 자국 제조업 육성과 중국 견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미국의 속셈이 훤히 읽힌다.
우리 수출은 지난달 5개월 연속 마이너스 성장했다. 국내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 수출액은 59억6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2.5% 급감했다. 반도체 수출의 40.3%(2022년 기준)를 차지하는 대중국 수출은 1월 31.4% 감소한 데 이어 지난달에도 24.2%나 줄었다. 미국의 대중 투자 규제는 우리에게 치명타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당시 뒷북 대응의 전철을 밟아선 곤란하다. 정부·기업이 민관 외교채널을 총동원해 ‘유예조치’, ‘조항수정’ 등 국익을 극대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반도체는 선행기업이 유리한 ‘승자독식’ 사업이다. 미국은 물론 대만·일본·중국 등이 앞다퉈 세액공제와 정책·보조금 지원에 나서고 있다. 우리도 반도체 지원법의 국회 통과를 서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