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일하려고 입고 나간 옷 한 벌이 남은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지난달 28일 충남 서산시 운산면 고산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장득희(49)씨는 1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지난해 4월9일 오전 운산면 고풍리에서 난 산불은 장씨가 사는 옆 마을까지 덮쳤다. 강한 바람을 탄 불씨는 운산면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불이야!” 마을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에 밭에서 일하고 있던 장씨는 허겁지겁 집으로 뛰어왔다. 그의 집은 이미 거센 불길 속에서 힘없이 형체를 잃고 있었다. 부모와 한평생 살아온 집은 2시간 만에 잿더미가 됐다. 가재도구며 딸아이 교복, 가족 사진, 집 밖에 있던 농기계까지 화마는 거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새까만 잿더미만 남은 모습을 보는 장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남은 재산이라고는 장씨가 걸치고 있는 옷 한 벌과 장화, 곡괭이가 전부였다. 그는 “타오르는 집을 보는데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며 “가족이 안녕한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었다”고 망연자실해 했다. 불길은 장씨 집뿐 아니라 온 마을을 훑고 지나갔다. 고산리 40가구 중 20가구 이상이 피해를 봤다. 팔중리에서도 집 한 채가 소실됐다. 당시 산불로 158㏊가 피해를 봤다.
장씨 옆집에 사는 송일예(90) 할머니는 지금도 산불 생각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팔다리가 후들거린다. 송 할머니는 “이른 아침에 마당에서 일하고 점심 먹으려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뒤를 도는데 옆집에 치솟는 불길을 봤다”며 “망부석이 된 듯 그 자리에서 덜덜 떨고 있는데 이장이 와서 ‘살려면 당장 나오라’고 소리쳐 겨우 빠져나왔다”고 회상했다. 이장은 송 할머니를 번쩍 들어 차에 태워 피신했다. 장씨 집은 전소했지만 송 할머니 집은 큰 피해는 면했다. 장씨 집과 사이에 있는 대나무 숲이 불길을 막은 것이다.
장종환(87·고산리)씨는 “평생을 산 이곳에서산불은 처음”이라며 “거대한 불길, 검은 연기, 재, 고성 등 마을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아비규환이었다”고 떠올렸다. 고산리 마을을 둘러싼 산은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빠진 듯 휑하다. 불길이 스친 나무는 밑동이 시커멓게 탄 채 서 있다. 고산리 경로당 앞 소나무 숲은 민둥산이 됐다.
산불은 순식간에 삶의 터전을 빼앗았지만, 복구는 더디다. 장씨 집이 있던 자리는 1년 가까이 아직도 흙터뿐이다. 집 앞마당에 가설한 6평 남짓한 농막(임시조립주택)이 장씨 가족의 보금자리이다. 4월부터 시에서 산불 피해 복구에 돌입한다. 장씨 집도 새로 짓는다. 송 할머니는 지금도 집에서 밥을 하다가도 수시로 밖을 내다본다. 산불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다.
마을 주민들은 새싹이 피는 올해 봄엔 희망을 뿌리자며 서로 다독인다. 장씨도 얼마 전 타버린 밭에 작물을 심었다. 장씨는 “집을 짓고 보금자리를 찾으면 심신도 안정이 될 것 같다”면서 “조금씩 일상회복을 하면서 새 희망도 가지려고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