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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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창칼럼] 尹정부도 연금 ‘폭탄 돌리기’ 하나

2022년 기금 운용 수익률 역대 최저
연금특위, 개혁 시늉만 하다 발 빼
역대 정부의 실패 반복 안 하려면
尹 대통령·정부가 더 적극 나서야

“둘 다 덩치가 크고 회색이며,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비둔해서 움직이기 힘들다는 것도 쏙 빼닮았다.” 연금 전문가인 카를 힌리히 독일 브레멘대 교수는 연금을 코끼리에 비유했다. 흔히 ‘코끼리 옮기기’로 불리는 연금 개혁의 사회적 합의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이자 대규모 시위로 아수라장이 된 프랑스를 봐도 알 수 있다.

1988년 국민연금 제도 도입 이후 연금 개혁은 두 차례뿐이다. 1998년 김대중정부는 소득대체율을 70%에서 60%로 낮추고,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0세에서 2033년까지 65세까지 늦췄다. 노무현정부는 2007년 소득대체율만 40%로 떨어뜨렸다. 당초 ‘보험료율 15.9% 인상, 소득대체율 50%’안을 추진했지만 국회의 벽에 막혔다. 두 번 모두 보험료율은 올리지 못한 한계가 있지만 미래 세대를 위한 용단으로 평가받는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이후 정부들은 선거 때만 연금 개혁을 외쳤을 뿐 ‘폭탄 돌리기’에 급급했다. 문재인정부도 연금 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허송세월에 그쳤다.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보고서가 올라오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고 손절했다. 선거에 미칠 악영향이 두려워서다. 비판이 커지자 연금 개혁안을 4개나 만들어 국회에 던져놓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호기롭게 연금 개혁을 외쳤지만 제대로 이행할지 의문이다. 윤 대통령이 “연금 개혁은 인기가 없어도 하겠다”고 장담했지만 도무지 진전이 없어서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기금 운용 수익률이 역대 최악으로 떨어져 파장이 만만치 않다. 가입자들은 노후자금을 걱정하고, MZ세대는 “더 내고 못 받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크다. 그런데도 정부와 국회는 개혁 로드맵을 서로 떠넘기며 시간만 축내고 있다.

작년 기금 운용 수익률이 -8.22%를 기록한 건 심상찮다. 손실액이 무려 79조6000억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2008년 -0.18%, 2018년 -0.92% 손실을 본 적이 있지만 작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국민연금공단은 국내외 주식, 채권의 큰 폭 하락이 원인이라고 했지만, 최근 10년 수익률도 글로벌 연기금 중 꼴찌 수준이다. 운용 수익률을 1%포인트만 올려도 기금 고갈 시점을 5∼8년 늦출 수 있다. 그러려면 기금운용위원회 수술이 시급하다. 비전문가는 솎아내고 그 자리를 세계 최고의 투자 전문가로 채워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연금 개혁이 벌써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지난해 11월 구성한 민간자문위는 보험료율·소득대체율을 조정하는 ‘모수 개혁’ 합의안을 도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보험료율 인상(9%→15%)안이 유출돼 여론이 들끓자 연금특위는 공적연금 전반에 대한 구조 개혁을 하자고 돌아섰다. 구조 개혁은 모수 개혁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모수 개혁 초안도 못내면서 구조 개혁을 하자는 건 발을 빼겠다는 얘기다.

윤 대통령이 ‘대통령 직속 공적연금개혁위원회’ 설치 공약을 폐기하고 그 역할을 연금특위에 맡겨 스텝이 꼬였다. 표에 죽고 사는 국회의원들이 “더 내고 덜 받으라”는 악역을 할까. 연금 개혁 주체들은 다음 선거에서 큰 곤욕을 치렀다. 연금특위 위원장인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마저 논의의 틀을 공론화위원회에 넘기자고 했다. 노무현정부의 연금 개혁은 ‘실세’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주도했기에 가능했다는 게 정설이다.

연금 전문가들은 큰 선거가 없는 올해가 연금 개혁의 골든타임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정부는 개혁안을 연말쯤 내겠다고 한다. 총선이 내년 4월인데 이렇게 늑장을 부려서 힘을 받을까.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연금 개혁 발언조차 삼가고 있다. 게다가 정부가 ‘연금 개혁 완성판’을 내놓겠다고 한 시점은 현 정부 임기가 끝나는 2027년이다. 전임 정부처럼 ‘폭탄 돌리기’를 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윤 대통령은 자신이 믿는 참모를 전면에 내세워 연금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노동 개혁을 밀어붙이는 것처럼 강한 의지를 보여줘야 여론도 호응할 것이다. 연금 개혁만 성공해도 윤 대통령은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이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