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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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출근·또 출근 후 기절…논란의 ‘주 최대 69시간 근무표’에 “잘 때 빼고 일만 해야”

정부 근로시간 개편안에 직장인 사이서 “시대 역행” 불만 목소리 커지면서 ‘기절 근무표’ 화제
우원식 “저녁 있는 삶 폐기해야 현장선 장기휴가 가능성 우려”
온라인 커뮤니티에 등장한 ‘69시간제 근무표’. 평일에는 오전 9시~이튿날 새벽 1시까지 근무한 후 5시간 취침하고 다시 근무하는 방법으로 총 69시간 일하게 된다. 주말에는 ‘기절’하거나 ‘병원’에 간다.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정부가 현재 주 최대 52시간인 노동 시간을 최대 69시간(주6일 기준)으로 늘리는 내용의 근로시간제도 개편안을 발표하자 노동계는 “시대착오적 초장시간 압축노동 조장법”이라며 강한 반발에 나섰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지난 10여년간 바뀌어왔던 제도나 인식이 한순간에 퇴보할 위기에 처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온라인에서는 새벽까지 근무한 후 주말에 ‘기절’하는 ‘69시간 근무표’가 등장하는가 하면 “퇴사하고 시급 아르바이트 하는 게 더 이득”이라는 볼멘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지난 6일 발표한 ‘근로시간 제도 개편방안’의 핵심은 11시간 연속휴식권을 보장하면서 일주일 최대 69시간까지 근무하거나, 휴식권 보장 없이 최대 64시간 근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골자다. 1주 최대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공짜 야근을 막기 위한 포괄임금 오남용 대책과 원할 때 쉴 수 있게 휴가 활성화 대책도 동반 추진하는 내용이 담겼다.

 

경제단체들은 일제히 환영의 입장을 냈지만 노동계는 즉각 반발에 나섰다. 한국노총은 “정부는 개편방안에서 노동자 건강보호를 위한 방안으로 제시했던 ‘11시간 연속휴식 부여’조차 포기했다”며 “죽기 직전까지 일 시키는 것을 허용하고 과로 산재는 인정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정부가 제시한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민주노총 역시 “아침 9시에 출근해 밤 12시에 퇴근하는 노동을 5일 연속으로 시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며 “휴일을 늘려 실근로시간을 단축하겠다고 하지만 만성적인 저임금 구조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장과 잔업을 거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지적과 더불어 온라인에선 ‘69시간 근무표’ 이미지가 화제가 되고 있다. 69시간 근무를 가정해 직장인의 일과를 그린 해당 이미지를 보면 평일엔 오전 9시부터 이튿날 새벽 1시까지 근무한다. 퇴근 후 5시간 ‘취침’ 후 다시 근무가 반복되는데, 주말에는 ‘기절’하거나 병원, 집안일 등 개인 일정을 간신히 소화할 수 있다. 과로로 인해 기절하듯 잠만 자게 되거나 병원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6일 구직자들이 근무시간 등 각 업체의 고용 조건이 적힌 일자리 정보 게시판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미디어 업계에서 영상 편집 업무 등을 하고 있다는 직장인 이모씨는 “주 52시간으로 인해 퇴근 후 취미 생활도 하고 주말에도 휴식을 취하며 그래도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며 “그런데 새벽까지 일해야 하는, 노예처럼 일하는 제도가 법으로 보장이 된다니 역행해도 너무 역행하는 것 같다”고 성토했다. 이씨는 “장기 휴가를 활성화하겠다는데 지금도 내 연차 쓸 때 상사 눈치가 보이는 상황에서 가당키나 한 말이냐”며 “현재 업무 특성상 추가 근무를 해야 할 때가 많은데, 결국 69시간 밤샘으로 일하고 휴가도 못 내고 다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7일 KBS 라디오 최경영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노동시간 유연화라는 얘기는 좋은 말로 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직장인들의 삶을 유연화시켜서 ‘워라밸’의 예측 가능성을 무력화시킨 것”이라며 “그동안 노력해온 ‘저녁 있는 삶’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 의원은 “OECD 최장 노동 시간 때문에 과로사가 가장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지난 2018년 주 52시간제가 확립됐다”며 “내가 언제 휴식을 취할지가 예측 가능했는데 일할 때 확 일하라는 것은 그것(예측가능성)이 없어진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또 “주 69시간은 6일로 나누면 하루에 11시간30분인데 11시간 휴식과 4시간 마다 30분씩 쉬는 것을 빼면 딱 11시간30분”이라며 “6일 동안 잠자는 시간 빼고 일만 하라는 얘기가 된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렇게 일하고 장기휴가를 주겠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할까”라며 “지금도 일이 많아서 초과 근무까지 해야 되는데 장기휴가가 가능할 수 있을지가 현장에서 의문시하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도 이날 논평을 내고 “노동자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단기간 집중 장시간 근로를 실체적·절차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하다”며 “정부의 이번 ‘근로시간제도 개편 방안’을 ‘장시간 근로제’의 추진으로 규정하며, 사용자의 입장만을 대변하여 사용자의 근로시간 선택권만을 절대적으로 강화하려는 정부의 태도를 강하게 규탄한다”고 비판했다.


김수연 기자 sooy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