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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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저항 ‘백장미단’ 마지막 생존자…103세로 별세

독일 나치 정권에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맞선 ‘백장미단’의 마지막 생존자 트라우테 라프렌츠가 지난 6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10일 AFP 통신과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백장미 재단과 라프렌츠의 아들은 그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자택에서 10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트라우테 라프렌츠의 1943년 모습. 위키피디아 커먼스

백장미단은 1942년 독일 뮌헨 대학교 학생들과 지도교수가 나치에 대항해 조직한 비폭력 저항 그룹이다. 이들은 전단을 배포하고 그라피티를 남겨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인들의 저항을 촉구했다.

이들은 전단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등을 인용하고 나치 정권의 범죄나 유대인 학살 등을 고발했다.

어둠을 틈타 거리에 “타도 히틀러”와 같은 슬로건을 그려넣기도 했다.

지도부가 1943년 2월 비밀경찰 게슈타포에 체포된 지 나흘 만에 참수형을 당하면서 백장미단은 1년도 되지 않아 활동을 중단했다.

 

이 사건은 자국 내 비폭력 반정부 운동에도 무관용으로 대응한 나치의 잔혹성을 드러낸다.

1919년 5월생인 라프렌츠는 함부르크 의대생 시절 백장미단을 결성한 알렉산더 슈모렐과 한스·소피 숄 남매를 만나 뮌헨으로 갔다. 그는 백장미단 활동 중 전단을 나르고 잉크와 종이, 봉투를 확보하는 역할을 맡았다.

숄 남매 등 백장미단 지도부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고 난 다음 달인 1943년 3월 라프렌츠도 체포됐다.

100세 생일에 독일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은 라프렌츠. 독일 외무부 트위터

당시 히틀러가 단두대 처형을 재개하도록 명령하면서 독일에서 5000명가량이 참수형을 당했다.

생전 소피 숄의 모습은 나치에 저항한 독일인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학교나 거리도 전국 수백 곳에 달한다.

 

라프렌츠는 1년 복역 후 석방됐으나 곧 다시 체포되는 등 1945년 4월 독일이 패전할 때까지 나치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그는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해 의학 공부를 마쳤으며 안과의사인 버넌 페이지와 결혼해 네 자녀를 뒀다.

20여 년간 에스페란자 특수학교의 교장을 맡았고 인지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2019년 5월 3일 라프렌츠의 100세 생일에 그에게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당시 라프렌츠를 “국가사회주의의 범죄에 맞서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독재와 유대인 학살에 저항하는 용기를 지닌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라며 “자유와 인류애의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