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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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소통에 과도한 족쇄” vs “대기업 친화 행보 우려” [심층기획]

공정위 ‘외부인 접촉관리규정’ 개정 추진

대기업인 등 만남 보고 의무화
정책개발 위한 접촉 위축 불러
갈라파고스섬처럼 외부와 단절
부정한 청탁 방지 효과도 의문

“정책 제안, 공적인 자리서도 가능
공직윤리제도 개선 흐름 어긋나”
‘대기업집단 기준 완화’ 추진 등
경제력 집중 억제책 붕괴 목소리

공정거래위원회가 한국판 ‘로비스트 규정’으로 불리는 ‘외부인 접촉관리규정’ 개정에 나선다. 2018년 1월 사건 처리의 투명성·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공정위 공무원이 퇴직자 등과 접촉할 때 그 내용을 보고하도록 하는 규정을 시행한 이후 약 5년 만이다. 공정위는 조사와 정책을 분리하는 대대적인 조직 개편에 맞춰 정책 담당 공무원에 한해 외부인 접촉 시 보고 의무를 완화하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공정위 안팎에서는 그간 접촉 관리 수준이 과도하게 규정된 탓에 정책 개발을 위한 소통마저 차단되는 이른바 ‘위축 효과’가 발생하는 등 이제는 족쇄를 푸는 방안도 검토해볼 때가 됐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경제 검찰’이란 공정위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관리 대상인 기업인과의 잦은 만남이 그간 축적돼 온 공정위의 신뢰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아울러 한기정 공정위원장 취임 이후 공정위의 ‘친(親)기업 행보’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대기업이 더 적극적으로 접촉에 나설 가능성이 커 하청업체 등 경제적 약자가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공정위 ‘로비스트 규정’ 개정 움직임 왜

15일 공정위에 따르면 한 위원장은 지난달 24일 서울대학교 경쟁법센터 등이 주관하는 조찬간담회에서 외부인 접촉관리규정 개선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한 위원장은 “위원장인 저도 (해당 규정으로) 외부 분들의 말씀을 듣는 데 어려움이 있어 불편함을 느낀다”며 “외부 접촉을 자제하는 것이 공정위 업무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정부 당시 김상조 전 위원장이 정부 기관 최초로 공정위 출신 퇴직자 등의 부정한 청탁을 막기 위해 관련 제도를 도입했는데,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미비점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현행 외부인 접촉관리규정에 따르면 공정위 공무원은 외부인과 사무실 내외에서 면담, 전화·이메일·문자메시지 등 통신 수단을 통한 비대면 접촉을 한 경우에는 접촉 후 5일 이내에 감사담당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외부인의 범위에는 공시대상기업집단 소속 기업인, 공정위 사건을 수임하거나 담당한 경력이 있는 일정 규모 이상의 로펌 소속 변호사 및 회계사, 공정위 퇴직 공무원으로 공시대상기업집단이나 로펌에 재취업한 사람 등이 포함된다. 만약 외부인이 조사 정보 입수, 사건 처리 방향 변경 등을 시도할 경우 공정위 공무원은 즉각 접촉을 중단해야 하며 보고 의무를 어겼을 때는 징계위에 회부된다.

공정위가 이런 규정을 개선하겠다고 나서는 건 규제 수준이 너무 과도해 오히려 정책 개발과 관련해 역효과가 많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탁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긴 하지만 공정위 내부에 민간과 소통을 꺼리는 정서가 퍼지면서 공정위가 마치 ‘갈라파고스섬’처럼 외부와 단절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 한 관계자는 “이 제도는 도입 당시부터 이런 문제가 예상돼 반대 의견도 많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도 비슷한 시기에 접촉 제한 규정을 도입했지만 2018∼2021년 외부인 접촉 보고 사례가 각각 5건과 6건에 그치는 등 상대적으로 공정위에 과도한 규제가 적용되고 있다는 목소리도 공정위 내부에선 제기된다. 같은 기간 공정위 외부인 접촉 보고 건수는 9126건에 달했다.

◆정책 담당자 외부인 접촉 보고 의무 완화할 듯

마침 공정위가 조사와 정책 부서를 완전히 분리하는 조직 개편에 나서고 있어, 이에 맞춰 접촉관리규정을 완화해 효과를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외부인 접촉관리규정 자체가 ‘사건’에 대한 부정한 청탁을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취지인 만큼 정책 담당 공무원의 경우 일정 부분 규제를 풀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위원장이 지난달 “정책 부서의 경우 업계, 전문가 등 외부 견해 수렴과 의사소통의 필요성이 높아지는 현실을 고려하겠다”고 밝힌 것도 조사와 정책을 분리하는 조직 개편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이에 따라 정책 담당 공무원에 한정해 외부인 접촉 보고 의무를 완화하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홍선 공정위 사무처장은 지난 9일 기자간담회에서 “기본적으로 유착, 부패를 예방하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책 파트 위험 요소가 적다면 좀 더 전향적으로 개선할 부분이 있는지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위는 정책 담당 공무원이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만나 소통을 강화하면 전문성이 높아져 입법을 포함한 정책의 완성도도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아울러 그간 정책 건의사항이 있어도 외부인이 먼저 소통을 포기하는 측면이 있었는데, 제도 개선으로 경쟁 규제와 관련한 시장의 애로 사항을 수렴하는 효과도 공정위 내부에서는 기대하고 있다.

◆대기업 친화 행보 더욱 강화될 것… 우려 목소리도

하지만 일각에선 외부의 부당한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해당 규정이 ‘순기능’을 했다는 평가도 많았던 만큼 규제 완화가 공정위의 신뢰도를 흔들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정위는 시장 지배력 남용 행위, 담합 등을 직접 조사하고 1심에 해당하는 심판 기능까지 수행하는 준사법기관의 성격을 갖는 동시에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등 13개 법률을 소관하고 있는 기관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경제 사법부처’라고 강조한 배경이기도 하다. 최재혁 참여연대 행정감시센터 간사는 “권력이 있는 기관이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관리될 필요가 있다는 측면에서 해당 규정이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그것도 제한적으로 공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위가 소통을 이유로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건 공직 윤리 제도 개선 흐름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정책 제안의 경우 토론회든 세미나든 공적인 자리를 활용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공정위의 대기업 친화 행보가 더욱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 한 위원장 취임 이후 공정위의 대기업집단 정책은 눈에 띄게 완화되고 있다.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한 업무보고에 따르면 공정위는 현행 자산총액 5조원 이상으로 규정된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상향하고, 금산분리 제도를 완화하는 방안도 살펴보고 있다. 이를 두고 경제개혁연대는 “공시대상기업집단은 대기업집단에게 공정거래법에서 정한 각종 공시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특수관계인에 대한 부당한 이익제공행위와 같은 불공정 관행을 차단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면서 “업무보고 내용은 대기업집단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려는 것으로, 공정위 스스로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격”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접촉관리규정 완화로 대기업의 영향력이 커지면 경제력 집중 억제라는 공정위 본연의 임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세종=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