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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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인고의 세월을 버틴 카베르네 소비뇽 ‘뮤지엄 빈티지’의 탄생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나파밸리 와인 태동기 1886년 설립된 티치슨 셀라스 역사 잇는 프리마크 아비/와인 30% 10년, 20년동안 셀러 장기 숙성한 뒤 세상에 내놓아/시간이 흐르며 변해가는 와인의 풍미가 주는 매력 발산

프리마크 아비 시캐모어. 인스타그램 캡처

“당신이 나를 망치게 만들었어!”

 

1976년 5월 25일 아침. 프랑스 크랑크뤼 클라세 1등급 ‘5대 샤토’중 하나인 샤토 무통 로칠드의 오너인 바론 필립 로칠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버럭버럭 화를 냅니다. 전날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결에서 미국 와인에 패하는 큰 망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받은 이는 파리의 와인 바이어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이고 그가 주최한 행사가 바로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의 맞대결로 유명한 파리의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입니다.

파리의 심판 현장
파리의 심판 현장

레드 부문에서 샤토 무통 로칠드 1973은 미국의 스택스 립 SLV 카베르네 소비뇽(Stag's Leap SLV Cabernet Sauvignon) 1973에 1위를 내주고 2위로 밀려났으니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겁니다. 화이트 부문에서 미국의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Chateau Montelena) 1973이 1위를 차지했죠. 당시 화이트와 레드 두 부문에 모두 출품한 유일한 미국 와이너리가 프리마크 아비(Freemark Abbey)랍니다. 꼬박 20년 기다림속에 탄생하는 시간을 담은 와인 ‘뮤지엄 빈티지’의 매력을 따라갑니다.

프리마크 아비 파리의 심판 출품 빈티지
시캐모어 2002

◆커피를 닮은 와인 시캐모어

 

신선한 원두를 곱게 갈아 정성스레 ‘점 드립’으로 방울방울 떨어뜨리면 ‘커피빵’이 부풀어 오르면서 거실에 은은하게 커피향이 번져갑니다. 사실 커피마니아들은 커피를 마실때보다 이 순간의 향을 더 좋아하죠. 놀랍게도 와인을 잔에 따르는 순간 이런 그윽한 커피향이 비강을 파고듭니다. 이어지는 블랙 커런트, 블랙체리, 석류 등의 과일향. 잔을 흔들면 숲속의 흙내음, 가죽향, 트러플, 버섯, 다크초콜릿까지 피어오릅니다. 또 하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앞에서 서 있는 듯,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 부르고뉴 빌라쥐급 피노누아를 연상케 하는 우아한 퍼퓸향이 발산돼 놀란 작은 눈은 최대치로 커집니다.

시캐모어 2002와 2018. 최현태 기자

프리마크 아비의 싱글빈야드 와인 시캐모어(Sycamore) 2002. 무려 20년 세월을 셀러에서 잠자다 지난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프리마크 아비의 명작 ‘뮤지엄 빈티지(Museum Vintage)’랍니다. 와인은 어떻게 이처럼 오랜 세월을 버티며 다양한 풍미를 만들어 낼까요. 한국을 찾은 잭슨 패밀리 그룹(Jackson Family Wines )의 마스터 소믈리에(MS) 피에르 마리 파티유(Pierre Marie Pattieu)와 함께 프리마크 아비 올드 빈티지 와인의 매력에 푹 빠져봅니다. 프리마크 아비는 아영FBC에서 수입합니다.

한국을 찾은 잭슨 패밀리 그룹 마스터 소믈리에(MS) Pierre Marie Pattieu. 최현태 기자

“네 맞아요. 피노누아처럼 우아한 와인이죠. 에스프레소 같은 커피는 물론 트러플 향도 올라옵니다. 샹볼 뮈지니, 쥬브레 샹베르탱 등 부르고뉴의 유명한 빌라쥐급 피노누아도 어릴때 마시면 큰 감동을 못 느끼죠. 5년까지도 비슷해요. 10년 정도는 돼야 차이가 나기 시작하며 20년 정도 숙성되면 양조때 만들어진 오크향이 모두 날아가고 포도밭의 떼루아가 보여주는 구조감만 남게된답니다.”

 

프리마크 아비가 올드 빈티지의 매력을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도입한 프로젝트가 뮤지엄 빈티지입니다. 매년 와인을 출시하지만 30% 정도는 셀러에서 장기 보관하는데 이 와인들은 먹기 좋게 무르익었을때만 매년 소량 세상에 선보입니다. 2022년에는 2002년과 2012년 빈티지를 내놓는 식입니다. 올해는 2003년과 2013 빈티지를 맛볼 수 있겠네요. 덕분에 소비자들은 최근 빈티지와 10년, 20년 지난 올드 빈티지를 비교하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복합미를 더해가는 와인의 매력을 잘 느낄 수 있답니다.

시캐모어 2018

시캐모어는 최근 시장에 출시된 빈티지가 2018인데 2002년이 보여주는 우아한 매력은 아직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매우 어린 와인입니다. 우아한 향은 언제쯤이나 올라오고 시캐모어는 과연 몇년동안 끄떡없이 버틸까요. “최근 1990과 1991 빈티지 매그넘을 테이스팅했는데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더군요. 시캐모어 2018빈티지는 앞으로도 15∼20년은 문제없이 숙성될 겁니다. 탄닌감이 우아하고 실키하며 산미도 상당히 좋아 시간이 흘러도 구조감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시캐모어는 이른 수확으로 좋은 산미를 얻어 파워까지 겸비한 와인입니다. 아로마는 많이 변하겠죠. 커피, 모카 , 담배향 등 3차향이 더욱 풍성해질 겁니다. 특히 1997, 2007, 2018이 좋은 빈티지로 꼽힌답니다. 우아한 향들은 6∼8년은 지나야 나타납니다. 그 전에 닫혀있는 편이죠.”

나파밸리 주요 산지

◆나파밸리 최고의 포도밭 루더포드

 

나파밸리 와인 생산량은 캘리포니아 전체 생산량의 4%에 불과하지만 매출은 25%를 차지합니다. 그만큼 프리미엄 와인이 많다는 얘기죠. 나파밸리 포도밭은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밸리 플로어(Valley Floor)와 산악지대입니다. 평야인 밸리 플로어는 세인트헬레나(St. Helena), 루더포드(Rutherford), 오크빌(Oakville), 욘트빌(Yountville)이 대표적이며 비옥한 석회암과 점토 토양입니다. 보통 탄닌이 부드럽고 과일향이 많이 납니다. 산악지대 포도밭은 하웰 마운틴(Howell Mountain), 다이아몬드 마운틴(Diamond Mountain), 스프링 마운틴(Spring Mountain) 등이며 화산암, 석회암, 자갈토 등 암석이 많은 척박한 토양으로 구조감이 뛰어난 포도가 생산됩니다. “나파밸리는 상당히 작은 포도재배지역이지만 아주 오래 전 지진이 많이 일어 난 지대로 토양 종류가 45개에 달할 정도로 다양해 복합미가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답니다.”

시캐모어와 보쉐 빈야드 위치
시캐모어 빈야드

나파밸리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포도밭이 오크빌과 루더포드로 프리마크 아비는 나파밸리의 심장부인 루더포드의 보쉐(Bosche)와 시캐모어(Sycamore)의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마야카마스 산맥(Mayacamas Range)과 맞닿은 시캐모어는 경사지고 비옥한 충적층입니다. 시캐모어는 미국산 플라타너스 나무를 뜻하는데 포도밭에 있는 수십 그루의 플라타너스 나무 덕분에 시캐모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보쉐 빈야드
보쉐 2002와 2018. 최현태 기자

시캐모어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보쉐는 깊은 자갈 토양입니다. 1960년 초반 존 보쉐(John Bosche)가 최초로 포도나무를 심었고 카베르네 소비뇽의 첫 빈티지는 1970년입니다. 나파밸리에서 최초로 싱글빈야드 카베르네 소비뇽을 생산한 헤이츠 와인 셀라(Heitz Wine Cellars)의 마르타스 빈야드(Martha’s Vineyard)가 바로 보쉐 묘목으로 만든 포도나무입니다. 헤이츠 와인 셀라 마르타스 빈야드 1970 빈티지는 파리의 심판 10주년을 맞아 1986년에 진행된 재대결에 레드와인 1위에 오른 와인입니다. 프리마크 아비 보쉐의 숙성잠재력은 15∼30년이며 다크 체리, 블랙커런트, 계피, 향긋한 삼나무와 정향, 다크 초콜릿, 시가 박스, 초콜릿, 오크 스파이스가 특징입니다.

프리마크 아비 나파밸리 카베르네소비뇽. 최현태 기자

프리마크 아비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도 싱글빈야드는 아니지만 보통 20년 이상 장기숙성이 가능한 와인으로 밸리 플로어의 오크빌, 루더포드, 세인트헬레나, 산악지대의 하월 마운킨, 스프링 마운틴의 포도를 섞어 만듭니다. 2012와 2018을 비교시음했는데 2012가 좀더 프리마크 아비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허브 뉘앙스가 도드라지고 우아한 산미가 돋보이는 유럽 스타일입니다.

프리마크 아비 나파밸리 샤르도네. 인스타그램 캡처

프리마크 아비 나파밸리 샤르도네는 버터리하지않고 신선한 과일향이 돋보입니다. 부르고뉴처럼 발효단계부터 오크에서 시작하는 배럴 퍼먼테이션으로 양조하며 16%는 스틸탱크에서 발효해 신선함을 유지합니다. 배럴에서 발효하면 과일향과 오크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집니다. 사과, 복숭아, 파인애플, 바나나 등의 과일향과 오렌지 마멀레이드, 베이킹 향신료, 바닐라 등도 느껴집니다.

조세피나 티치슨. 인스타그램 캡처

◆나파밸리 최초의 여성 와인메이커 등장

 

프리마크 아비의 역사는 1886년 필라델피아 출신 조세피네 티치슨(Josephine Tychson)이 세인트 헬레나에 티치슨 셀라스(Tychson Cellars)를 설립하면서 시작됩니다. 나파밸리에 포도나무가 처음 심어진 것은 1983년이니 티치슨 셀라는 나파밸리 와인 태동기 와이너리로 조세피네는 최초의 여성 메이커로 기록됩니다.

1890년대 돌로 쌓은 롬바르다 와이너리 전경. 인스타그램 캡처
롬바르다 셀라. 인스타그램 캡처
프리마크 아비 현재 모습. 인스타그램 캡처

하지만 포도나무 뿌리를 병들게 만드는 필록세라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1894년 와이너리는 이탈리아 이민자 안토니오 포르니(Antonio Forni)에게 넘어갑니다. 포르니는 자신의 고향인 롬바르디아 지명을 따 롬바르다 셀라(Lombard a Cellar)로 이름을 바꿉니다. 돌로 쌓은 현재의 와이너리는 포르니의 작품입니다. 1929년 미국 전역에 내린 금주법으로 경영 위기에 처하자 1939년 캘리포니아 남부의 부동산 개발업자이던 찰스 프리먼 (Charles Freeman), 마크 포스터(Mark Foster), 아비 아헌(Abbey Ahern)이 와이너리를 인수했고 세 사람의 이름을 따 프리마크 아비가 탄생합니다.

와인메이커 Ted Edwards. 인스타그램 캡처
와인메이커 Kristy Melton. 인스타그램 캡처

테드 에드워드(Ted Edwards)가 1985년부터 와인메이킹을 총괄하며 많은 역작들을 탄생시켰고 2020년부터 크리스티 멜튼(Kristy Melton)이 합류에 테드의 양조철학을 공유하며 나파밸리 최초의 여성 와인메이커 조세피네의 열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olar),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등을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selles) 심사위원, 소펙사 코리아 소믈리에 대회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보르도, 부르고뉴, 상파뉴, 알자스와 호주, 체코, 스위스,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