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4시쯤 서울 강남구 학동초등학교 정문 앞 스쿨존(School Zone: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놀란 외침이 울렸다. 순간 태권도복을 입고 신나게 작은 손을 흔들던 김모(12)군 옆으로 검은색 승용차가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지나갔다. 김군에게 큰소리로 위험을 알렸던 한세영(12)양은 “차들이 쌩∼ 지나가고 애들이 가운데(차도)로 들어갈 때도 잦아서 ‘차 조심해’라는 말을 친구끼리 자주 한다”며 “가끔 공사 차(덤프트럭)들도 빨리 지나가는데 그때는 엄청 무섭다”고 했다.
#2. 17일 오전 8시 인천 중구 신광초 스쿨존에서는 어린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등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목재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양방향 6차로 중 인도와 붙은 가장 끝쪽 차선에서 우회전했다. 일단 멈춤을 하기는커녕 경적까지 울리며 불법으로 차를 돌려 달렸다. 어린이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이곳은 2021년 3월18일 오후 1시52분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10세 초등학생이 불법 우회전하던 25t 트럭에 치여 생명을 잃은 참사의 현장이다.
◆한국, 스쿨존 횡단보도서 쌩쌩
스쿨존은 어린이 절대안전 구역이어야 하지만 세계일보가 점검한 대한민국 현실은 참담하다.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언북초 정문 앞 스쿨존. 지난해 12월 당시 3학년 어린이가 스쿨존 내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고귀한 목숨을 잃은 현장 바로 옆이다.
어른들은 어린 죽음을 벌써 잊었나. 오후 4∼5시 학교 정문 앞을 지나간 차량 67대 중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 우선멈춤을 지킨 차는 3대에 불과했다.
스쿨존은 만 13세 미만 어린이의 이동이 잦은 초등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학원 등 시설 주변에 지정된다. 여기서 운전자는 30㎞(도심부 이면도로 기준·도로폭 8m 미만에서는 시속 20㎞) 이하로 천천히 운전해야 한다. 또 지난해 7월12일부터는 신호등이 없는 스쿨존 횡단보도에서는 무조건 차량을 일시 정지해야 하는 개정 도로교통법이 시행됐다. 신호등 없는 스쿨존 횡단보도에서 우선멈춤 없는 차량통행은 명백한 불법이다.
지난 16일 방과 후 교실이 끝나는 오후 4시쯤부터 1시간 동안 지켜본 학동초 앞 스쿨존도 절대위험 구역이긴 마찬가지였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일시 정지한 차량은 93대 중 단 3대.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하는 차량과 오토바이까지 등장해 뒤죽박죽 도로가 되기도 했다.
2019년 9월 스쿨존 내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김민식군(당시 9세) 희생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2020년 3월 스쿨존 내 안전운전 의무 부주의로 사망이나 상해사고를 일으킨 가해자를 가중처벌하는 민식이법이 시행되고, 스쿨존에서의 차량 제한속도 하향조정 신호등·과속단속장비 확대도 있었으나 어른들의 부주의로 크고 작은 사고는 계속되고 있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20∼2021년 스쿨존에서 어린이(12세 이하) 교통사고로 5명이 숨지고 1070명이 다쳤다.
16일 점검한 김민식군이 생명을 잃은 충남 아산 온양중학교와 김군이 다니던 온양초 부근에는 신호등, 보행자보호 안전펜스가 촘촘히 갖춰졌지만 등하교 시간대가 아니거나 단속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는 시속 30㎞ 수준을 넘는 차량이 적지 않아 언제든지 사고가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방과 후 시간이 더 위험
세계일보 점검에서는 어린이 교통안전 대응에 시공간적 구멍이 발생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시간적으로는 하교 이후 시간, 공간적으로는 불법주차가 횡행하는 골목길이 안전사각(死角)이었다. 현재 경찰의 단속과 계도, 교통안전지킴이의 안전활동이 주로 등교 시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찰에 따르면 언북초 인근 지구대·파출소에서는 오전 8~9시의 등교시간과 오후 1~2시의 하교시간 교통통제, 법규위반차량 단속을 하지만 방과 후 시간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학동초 앞에서 만난 최재희(12)·서지한(12)·서지원(11)군은 입을 모아 “오전 8시40분쯤 등교할 땐 경찰관이 쭉 서 있어서 차들이 기다려준다”며 “그렇지만 야구 연습(방과후교실) 끝나고 저녁에 (학교)보안관 아저씨도 없으면 (차들이) 엄청 빨리 지나가서 무섭다. 우리가 기다렸다 건넌다”고 했다.
도로교통공단 교통사고분석시스템(TAAS)의 어린이 교통사고 통계에 따르면 2017∼2021년 5년간 가장 많은 교통사고가 발생한 시간은 하교 이후인 오후 4∼6시(22.8%·1만1283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간대에 발생한 사고는 등교 시간인 오전 8∼10시에 발생한 사고(9.1%·4498건)보다 2배 이상 많았다. 그다음으로는 오후 2∼4시(18.3%·9057건), 낮 12시∼오후 2시(11.9%·5892건) 순으로 많이 발생했는데 모두 하교 이후 시간이다.
스쿨존 내 신호과속 단속카메라 설치뿐만 아니라 스쿨존과 주변의 경찰관, 교통안전 지킴이 활동 시간을 확대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이유다. 스쿨존 주변 골목길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주차단속 강화도 필요하다. 학부모인 김민정(41)씨는 “골목길에는 차들이 주차돼 있어 어린이들이 차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TAAS에 따르면 횡단보도 바깥에서 나는 사고가 5년간(2017∼2021년) 발생한 스쿨존 내 어린이 교통사고의 32%(640건)에 달한다.
◆일본 운전자, 어린이 안전 최우선
이웃나라 일본의 스쿨존 상황은 많이 달랐다. 20일 오전 8시쯤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구 우시고메나카노(牛込仲之)소학교(초등학교) 부근은 등교 어린이로 분주했다. 통학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일방통행 도로에서는 차량이 시속 약 20㎞로 서행 중이다. 횡단보도 앞에선 그마저 속도를 줄였고 어린이가 길을 건널 듯 횡단보도 근처로 오면 멈추고 안전횡단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천천히 굴러갔다. 신호등, 교통지도를 하는 사람 한 명 없는데도 20여분간 이 길을 지나간 20여대의 차량 모두 같은 움직임이다.
같은 날 오후 1시쯤 하교 시간의 신주쿠구 도미히사(富久)소학교 인근. 차량통행이 많은 큰길에서 학교 정문까지 이어진 약 300m의 굴곡 도로 곳곳에는 대형 볼록 거울이 설치돼 운전자가 어린이 안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학교 앞에서 만난 초등생 학부모 마쓰이 다카시(松井隆)씨는 “나도 운전 중 스쿨존 표시를 보면 정지선이나 속도에 더 신경을 쓴다”고 말했다. 특히 통학로에는 주변에는 주차된 차량이 한 대도 없어 보행자가 안전은 물론 쾌적함마저 느낄 정도다.
일본은 학교를 중심으로 반경 약 500m 내를 스쿨존으로 정한다. 보육원이나 유치원 인근도 스쿨존으로 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교통표지판이나 노면표시, 전신주 등에 부착한 안내판 등을 통해 운전자가 스쿨존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차량 속도는 시속 30㎞ 이하로 제한한다. 스쿨존은 일본 경찰청이 보행자 등을 위해 생활도로(주민 거주지 등에서 주요 도로까지 나올 때 이용하는 길)를 대상으로 최고 속도를 30㎞로 정한 ‘존(zone)30’에 포함된다. 지난해 발간된 교통안전백서에 따르면 2011년 이 제도 도입 후 단계적으로 설치되고 있는 존30(2021년 기준 전국 4186곳)에서 사망, 중상자 발생 사고 건수는 설치 전년보다 29.4% 감소했다.
주민의 자발적 참여로 스쿨존이 운영된다는 점이 일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교토(京都)시 미나미(南)구 주민이 직접 그리는 노란 개구리 표시가 그런 사례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미나미구의 도로 곳곳에는 멈춤이라는 글자와 함께 크고 작은 노란색 개구리 그림 280개 정도가 그려져 있다. 1971년 지역의 교통량이 늘고 교통사고가 증가하자 도입돼 처음엔 낙서로 오해도 받았으나 독특한 모양으로 운전자, 어린이의 주의를 환기하는 데 효과가 있자 50여년간 이어지고 있다. 신문은 “색이 바래기 때문에 한 해에 두 번 새로 그리는 게 필수인데 이 지역에서는 일상적인 이벤트”라며 “주민이 직접 그리는 거라 개구리의 표정 등이 조금씩 다르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