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연륜을 가진 연기파 배우일수록 영화 속에서 자신의 특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반대로 본인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감독은 배우를 의도한 대로 끌고 가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이들이 만난다면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오는 31일 전 세계에 동시 공개되는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은 이미 배우로서 평단과 관객의 검증을 거친 전도연과 설경구가 주연을 맡고,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킹메이커’ 등을 통해 감각적이고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는 변성현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이들의 이름만으로도 화제가 될 만하다.
국내 최고의 암살 기업인 MK, 그중에서도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킬러인 길복순(전도연 분)은 재계약을 앞둔 시점에서 딸과의 사이가 멀어지고, 업계의 규칙마저 어기게 되면서 다른 킬러들의 표적이 된다. MK의 대표이자 복순의 스승인 차민규(설경구 분)는 그런 복순을 보며 갈등에 빠진다.
영화에는 변 감독의 스타일이 진하게 녹아 있다. 21일 서울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변 감독은 “늘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를 보고 시작한다”며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면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들을 굉장히 좋아하고 흉내 내려 노력하고 있다. 액션 장면 같은 부분은 이명세 감독님의 스타일을 감히 따라 하진 못하지만 흉내 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길복순에선 스코세이지의 롱테이크와 타란티노, 그리고 이명세의 감각적인 액션 냄새가 난다.
영화의 도입부 일본 야쿠자 오다 신이치로(황정민 분)와 복순의 결투, 킬러들과 술집 싸움, 민규와 결전은 롱테이크와 카메라의 무빙, 시간의 변주를 통해 액션을 미학적으로 표현한다. 감독의 철저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장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실력은 좋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불운한 킬러인 한희성 역을 맡은 구교환은 액션신에 대해 “액션이라기보단 안무에 가까웠던 것 같다. 개인의 기량으로 가는 게 아니라 팀플레이처럼 안무를 짜서 춤추듯이 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왜 액션영화에 전도연일까. 변 감독은 길복순이 전도연을 염두에 둔 영화라고 했다. 변 감독은 “전도연 선배가 출연한 너무 좋은 작품이 많아 (드라마 장르의) 정면 승부는 부담이 됐다. 측면 승부를 해보자고 생각해, (전도연의) 필모그래피에 거의 없는 액션으로 장르를 정했다. 시나리오는 한참 후에 썼다”고 섭외와 구상에 얽힌 얘기를 풀어놨다.
변 감독은 “전도연과 설경구의 배우라는 역할을 킬러로 치환시킨 영화”라고도 했다. 영화 중 차민규의 동생인 차민희(이솜 분)가 “오래된 칼들은 날도 무뎌지고 쓸모가 서서히 없어진다”며 복순을 깎아내리자, 민규는 “무딘 칼이 더 아프다”고 맞받는다. 이 대화가 전도연과 설경구를 칼에 빗댄 찬사라는 점을 변 감독은 강조했다.
철두철미한 변 감독의 스타일에서 전도연이나 설경구의 색깔이 감춰지는 건 아닐까. 변 감독과 첫 호흡을 맞춘 전도연은 촬영 초기 움직임과 얼굴 각도까지 정한 대로 맞추길 원하는 연출 스타일이 낯설었다고 털어놨다.
전도연은 “배우가 감정이 있는데 가둬놓고 못 움직이게 해서 첫 촬영 때 감독님에게 불평을 많이 했던 것 같다”면서 “내 감정을 풀어놓고 하는 게 아니라 감독님이 원하는 동선 안에서 명확하게 원하는 감정 표현을 했을 때 어떨까, 궁금함이 있었고 굉장히 흥미롭고 호기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면 감독의 연출 의도에도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과 배우가 쓰는 언어, 그리고 몸짓은 결국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기 힘든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액션신이 많은 영화지만 감독이 신경 쓴 것은 오히려 배우들이 각각의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변 감독의 액션신 촬영이 쉬웠을 리 없다. 전도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한다고 세뇌를 많이 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는 “배우들끼리 (대역 없이 액션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연습을 많이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면 동작보다 감정이 앞설 수 있고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럽고 어려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전도연의 액션 도전은 2015년 ‘협녀, 칼의 기억’에 이어 두 번째고, 현대 액션물로는 처음이다. 당시보다 액션의 강도도 훨씬 세졌다.
설경구는 “(전도연의) 액션 장면을 옆에서 봤는데 안쓰러울 정도로 한계를 넘으려는 모습이 걱정됐지만 자기 한계를 넘더라”며 “전도연은 전도연”이라고 극찬했다.
변 감독은 롱테이크 액션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재촬영을 하자는 배우들의 열정에 오히려 부담을 느낀 적도 있다고 한다.
변 감독은 “배우가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중간에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촬영감독님이랑 다시는 이런 영화 찍지 말자고도 했다. 이제 액션이 주가 되는 영화는 안 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