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끓인 물 숙우에 따라 김 식히고 다관에 조심스레 붓는다. 녹차 잎 천천히 우러나면서 피어오르는 그윽한 향기. 미리 데운 찻잔에 여리여리한 풀잎색 닮은 녹차 한 줄기 따라 마시자 혈관을 타고 손끝 발끝까지 싱그러운 봄이 흐른다. 곡우를 향해 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녹차 잎과 저 멀리 산수화 같은 월출산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곳, 영암 덕진차밭에 섰다.
◆싱그러운 덕진차밭에서 즐기는 남도의 봄
우전, 세작, 중작, 대작, 엽차. 녹차는 4∼7월 찻잎을 따는데 시기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모두 다르며 곡우인 4월 20일 이전에 딴 우전을 최고로 친다. 전남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 덕진차밭으로 들어서자 봄 햇살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는 이파리들이 제법 푸르다. 차밭 사이에 상체만 살짝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우전을 앞두고 가장 좋은 품질의 녹차가 자라도록 바쁜 손길을 놀린다.
찾는 이 많지 않아 온통 싱그러운 녹색이 가득하다. 전남 보성이나 경남 하동 녹차밭과 비교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 때문. 심지어 영암 사람들도 모르는 이가 많다. 덕분에 분주함과는 거리가 먼, 비밀의 정원 같은 고즈넉한 차밭을 나 홀로 거닐며 봄기운을 느끼기 좋다. 차밭 사이로 들어간다. 손끝에 닿는 녹색의 활기찬 생명력.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답답한 도시의 공기와 미세먼지로 찌든 폐가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다.
백룡산 자락에 고즈넉하게 터를 잡은 덕진차밭의 정식 이름은 ‘한국제다 영암 제2다원’. 영암에 있는 두 번째 다원이 아니라 장성 1다원, 영암 2다원, 해남 3다원 중 하나로 덕진면에 있어 덕진차밭이라 부른다. 백룡산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로 사시사철 샤워하고 낮 동안 따사로운 햇살을 잘 받는 남향의 경사진 밭이라 뛰어난 품질의 녹차가 생산된다. 1979년부터 조성돼 40년이 넘은 덕진차밭은 모두 5만여평 규모로 한국제다의 주력 농장. 재래종 차가 90%에 달한다.
덕진차밭의 매력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 바로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많아 예로부터 ‘영산(靈山)’이라 불리는 월출산과 녹차밭이 어우러지는 숨은 비경이다. 10여분 걸어 녹차밭 정상인 백룡정에 오르자 층층이 겹쳐지는 녹차밭 너머에 장엄한 월출산이 펼쳐진 풍경이 장관이다. ‘좋은 날, 여기 영암.’이라 적힌 포토존 앞에 서면 월출산의 능선들이 솜씨 좋은 작가의 작품처럼 액자에 모두 담기는 풍경을 만난다.
◆다도와 미술작품 함께 즐기는 이안미술관
우전을 맛보려면 아직 좀 기다려야 하니 솜씨 좋은 명인의 차를 맛보러 삼호읍 산호리 이안미술관으로 향한다. 온통 깨끗한 화이트톤으로 외벽을 꾸민 이국적인 건물은 순식간에 유럽으로 날아간 듯하다. 운치 있는 소나무가 바위와 어우러지는 넓은 정원엔 여인을 모티브로 만든 조각작품이 곳곳에 놓여 미술관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누운 바위에 적힌 시 한 편이 가슴으로 훅 치고 들어온다. ‘어허라… 인생사가 청산 꽃 구름’ 화려한 꽃일 때도 있지만 속절없이 흩어지는 구름같기도 한 인생사를 간결한 한 줄에 잘 담았다. 이안미술관 박경곤 대표의 작품.
미술관으로 들어서자 차향이 그윽하다. 노미정 관장이 한껏 솜씨를 부려 맛있게 차를 내리는 중이다. 박 대표의 아내인 노 관장은 명원문화재단 최고명인(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7호 궁중다례의식)으로 재단 영암·목포지부장과 다도 교수로 활동하는 다도 전문가. 역시 명인이 내린 차는 좀 다르다. 씁쓸한 맛도 거의 없어 아주 부드럽다. 함께 내준 커피콩빵과 찰떡궁합. 미술관 1층엔 ‘박화수 초대전 빛을 만나다’가 전시 중이다. ‘골드 문’을 바탕으로 요철 효과를 지닌 ‘훈민정음’과 ‘월인천강지곡’ 인쇄본 위에 채색해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결합한 작품.
2층 전시실에는 정명자 대한명인(공예분과 태극기자수 분야)의 엄청난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작품완성까지 무려 7년이 걸린 병풍과 능행도, 미인도 등이 걸려 있다. 멀리서 보면 그냥 단순한 그림처럼 보이는데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만든 자수 작품이라는 사실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3층은 세미나실과 체험장으로 꾸며졌다. 오랫동안 공직에 몸담은 박 대표는 이곳에 있던 영산미술관을 사들인 뒤 완전히 리뉴얼해 지난해 11월 이안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풍경을 담은 정원을 산책하며 힐링하고 작품과 차를 모두 즐길 수 있어 요즘 영암 여행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노 관장은 한국 고유의 미를 담는 전통미술과 독창적인 남도예술을 중심으로 전시를 꾸려갈 예정이다. 또 소장품 상설전시와 지역작가 초대전, 공방 운영, 다례·예절교육, 인문학 강좌 등의 공간으로도 꾸미게 된다. 외부에는 야외전시실, 유럽식 정자, 야외공연장이 마련돼 음악회 등 다양한 공연도 무대에 오른다.
◆남도 8대 정자 부춘정 올라 동강을 마주하다
월출산을 마주하는 또 하나의 숨은 여행지가 영암읍 망호리 부춘정(富春亭)으로 전남의 8대 정자 중 하나다. 정자의 이름은 ‘봄이면 마음이 넉넉해진다’는 뜻이니 봄 여행에 부춘정만큼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화순, 장흥에도 부춘정이 있어 구분하기 위해 ‘영암 부춘정’이라 부른다.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남도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부춘봉 아래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부춘정은 한눈에도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부춘정 앞을 꾸미는 돌계단, 그리고 수백년 수령의 아름드리 팽나무 덕분. 아직 새잎이 돋지 않아 잔가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무가 파란 봄하늘과 멋지게 어우러진다.
조선 후기의 정자로 앞쪽에 마루 4칸을 놓고 그 뒤쪽에 방 4칸이 딸린 매우 독특한 형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특히 대들보 위에 ‘쌍시옷(ㅆ)’ 구조로 지붕틀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든 구조여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평양판관 겸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청암 강한종이 1618년(광해군 10년) 지은 정자다. 그는 광해군 때 난정에 상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향해 부춘정을 짓고 학문의 장으로 삼았다. 달이 뜰 때 부춘정에 앉으면 호남의 명산 월출산 풍경이 아주 빼어났던 것 같다. 강한종이 지은 시 한 편이 걸려 있는데 ‘정자 안에 즐거움이 있고 한가로이 낚시질한다’는 내용이다. 실제 부춘정 인근에 낚싯대를 드리울 수 있는 영암천, 금성천, 망호천이 유유히 흐른다.
활성산 풍력발전단지는 산등성이 위로 이어지는 하얀 풍력발전기를 배경으로 그림엽서 같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금정면에 있는 498m 높이의 활성산은 1990년대 말까지 대관령 삼양목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내 두 번째 규모의 서광목장이었다. 그러나 1998년 외환위기 때 모기업인 서광그룹의 부도로 운영이 중단됐고 이후 대명GEC가 부지를 인수해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했다. 드넓은 초지와 아름다운 풍광으로 드라마 ‘주몽’ ‘로드넘버원’ ‘근초고왕’ 등의 촬영지로 선택된 곳이다.
시종면 옥야리 마한문화공원에선 영산강 유역에 산재한 고분문화와 고대 마한문화의 역사를 마주한다. 기원전 2세기부터 한반도 중서부지역에 자리 잡은 마한은 백제에 흡수된 고대국가. 영산강 유역은 수량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해 벼농사의 최적지인 데다 공원이 있는 남해포 일대는 강과 바다가 접하는 곳으로 고대문화가 꽃피운 것으로 전해진다. 전시관, 마한생활 문화 체험장, 농경 체험장, 고분탐사관(몽전), 전망대 등으로 꾸며졌다. 고려 현종 때부터 해신제를 지내던 남해신사와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되는 19기가 발굴된 옥야리 고분군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