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의 ‘갑질’을 폭로하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이 서울 대치동의 아파트의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동료 경비원은 “몇 안 되는 퀴퀴한 지하실 휴게실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2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아파트 단지. 이곳에서 10여년 넘게 근무 중이라는 경비원 A씨는 주로 생활하는 1.5평 남짓의 좁디좁은 경비 초소를 가리키며 “그래도 에어컨은 있어서 여름에 견딜만하다”고 멋쩍게 웃어보였다. 오후 10시부터 이튿날 오전 4시까지인 휴게시간에 눈을 붙일 수 있는 침대는 길이가 160㎝도 안돼 보였다.
이곳 아파트에는 경비원 화장실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아 급할 때는 ‘탕비실’이라고 불리는 0.5평 샤워실에서 주로 볼 일을 본다고 한다. 단체로 사용하는 휴게실도 3~4곳 있었으나 지하에 있어 석면벽 이곳저곳에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공식 휴게소는 노인정 안에 있지만 입주민과 함께 사용해 눈치가 보이다보니 경비원들은 잘 찾지 않는다고 한다. A씨는 “지하 휴게실에서 주로 식사를 해결한다”며 “초소를 오래 비우면 주민들 항의도 있고 그래서 빨리 먹고 올라가곤 한다”고 했다.
A씨가 보여준 휴게실에는 지하 휴게실 통틀어 유일하게 세면대가 있어 나름 좋은 휴게실로 꼽힌다고 했다. 휴게실 곳곳에는 주민들이 버린 식탁이나 집기류 등이 놓여있었다. 전기밥솥은 4개나 있었는데, A씨는 “우리 돈으로 사기에는 비싸고 주민들이 버린 것들이 상태가 좋은 게 대부분이라 재활용해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지난 14일 경비원 박모(74)씨가 관리소장의 갑질을 폭로하는 호소문을 남기고 투신 사망한 곳이다. 호소문에는 이곳에서 11년간 일한 박씨가 관리소장의 부당한 인사 조처와 인격 모독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됐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동료의 죽음에 이 아파트 경비원 74명은 지난 20일 관리소장의 퇴진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이들은 관리소장이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의 비호 아래 박씨에게 부당하게 인사조처를 하고 인격을 모독해 박씨가 죽음이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비원들은 또 구조조정과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 등으로 고용 불안에 시달려왔다고도 호소했다. 지난해 12월 관리소 위탁업체가 바뀐 이후 이곳 경비원 13명이 고용승계가 되지 않아 퇴사했다. 박씨가 숨진 뒤 6명이 부당한 업무 지시와 고용 불안을 이유로 사직서를 냈으며 약 10명이 퇴직 의사를 밝혔다. 실제 이날 만난 경비반장의 초소에는 새로운 이들의 이력서 용지가 가득 뽑혀있었다.
3년 전 경비원에 대해 업무 외 지시와 부당한 징계 등 갑질을 막는 법 규정이 신설됐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은 30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에서 입주자와 관리주체가 경비원을 상대로 업무 이외에 부당한 지시 등을 금지한다. 이 조항은 지난 2020년 신설된 조항으로 이른바 ‘경비원 갑질 방지법’이라고 불린다. 2020년 4월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희석씨가 한 입주민에게 폭행당하는 등 괴롭힘에 시달리다 같은 해 5월 최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계기로 해당 조항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위법 시 처벌 규정이 없을뿐더러 자발적인 피해 신고도 어려워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경비원 B씨는 “초단기 계약직이다보니 재계약 문제도 있고 또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게 어려워 쉽게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B씨는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은 약과다. 자연스러운 무시와 폭언이 일상화돼있다. 노예처럼 부려먹으려는 심보가 있는 것 같다”며 “관리소장 한 명의 문제로 동료가 죽은 것이긴 하지만, 이 한 명을 넘어 경비원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개선돼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