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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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있는 호응 어디에…'역사 왜곡' 노골화 택한 일본

日 초등교과서 검정 승인 파장

‘독도는 日 고유영토’ 표현 강화
징병·강제동원도 강제성 부정
한·일회담 끝나자마자 역사 왜곡

野 “굴욕외교 대가가 이건가” 비판
대통령실, 입장 안 밝힌 채 말 아껴
외교부 “수십년 주장 답습에 유감”

일본 정부가 28일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병, 강제동원에 대해 강제성을 희석하거나 부정하는 내용의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 검정을 승인했다. 독도 관련 내용은 일본 영토란 기존 억지 주장을 더욱 강화했다.

한국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 해법을 마련한 것을 계기로 지난 16일 한·일 정상회담을 열어 본격적인 관계 개선을 모색하던 중에 일본 정부의 왜곡된 역사 인식이 재차 확인돼 파장이 클 것으로 보인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28일 교과서 검정심의회를 열어 2024년도부터 초등학교에서 쓰일 교과서 149종이 심사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독도가 일본 시마네현에 속한다고 기술한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들. 연합뉴스

일본 문부과학성은 이날 교과서 검정심의회를 열어 초등학교에서 2024년도부터 쓰일 교과서 149종이 심사를 통과했다고 발표했다.

이 중 초등학교 4∼6학년에서 사용할 사회 교과서는 징병 관련 기술에 ‘지원’을 추가해 강제성을 덜어낸 것으로 확인됐다. 초등 사회 교과서 점유율 1위인 도쿄서적은 “조선인 남성은 일본군의 병사로 징병됐다”는 기존 표현을 “조선인 남성은 일본군에 병사로 참가하게 됐다”로 바꿨다.

독도에 대해서는 지도를 활용해 ‘다케시마(독도)가 일본 고유영토’이며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어 일본이 항의하고 있다’는 요지의 내용을 강화했다. 특히 그간에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표기한 일부 교과서도 모두 ‘일본 고유영토’라고 표현을 강화·통일한 것이 눈에 띈다. 고유영토(固有領土)란 역사상 한 번도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된 일이 없는 영토를 뜻한다. 일본 정부는 2017년 초·중학교 학습지도요령 등의 지침을 내려 “다케시마가 우리나라(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사실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점을 다룰 것”을 지시한 바 있다.

강제동원 관련 기술에서는 강제성을 드러내는 표현들이 약화된 것으로 파악됐다. 도쿄서적은 기존의 “강제적으로 끌려와”라는 표현을 “강제적으로 동원돼”라고 바꾸고 관련 사진에는 조선인들이 지원했다는 설명을 달았다. 다른 교과서에서는 “조선과 중국에서 많은 사람을 끌고 와 힘든 노동을 시켰다”는 등의 표현으로 ‘강제’, ‘동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 초등학생이 내년도부터 사용할 사회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병에 관한 기술이 강제성을 희석하는 방향으로 변경 발표된 28일 서울 용산구 용산역광장에 자리한 강제징용노동자상 앞으로 시민이 지나고 있다. 뉴스1

◆조선인 징병 → 지원… 강제동원 ‘끌려왔다’ 표현도 삭제

 

28일 일본 정부 검정을 통과한 초등학교 교과서는 독도를 ‘일본의 고유영토’로 표기를 통일해 영유권 주장을 강화하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징병, 강제동원의 강제성을 축소, 약화한 것이 두드러진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지난 16일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고 공언한 것과 별개로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주입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양국 정상이 외친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 목소리도 퇴색하게 됐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고유영토 다케시마 한국이 불법 점거’

 

독도 관련 기술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독도를 ‘일본 영토’ 혹은 ‘일본 고유영토’로 혼재해 사용하던 것을 ‘일본 고유영토’로 통일한 점이다.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 번도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된 적이 없다’는 억지를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2019년 검정본 일본문교출판 6학년 사회 교과서에서 ‘일본 영토’라고 했던 것을 이번에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변화에 대해 “(‘일본 영토’란 표현을) 아동이 오해할 우려가 있어 ‘고유’란 표현을 추가했다”는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을 했다.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킨 시각 자료도 적극 활용했다. 일본의 영토, 영해, 영공과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표시한 지도에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표기하며 일본의 EEZ와 영해에 포함하는 방식이다.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징병 관련 기술에서는 ‘조선인의 지원(志願)’을 추가했다. 도쿄서적은 “(조선인) 남성은 일본군의 병사로서 징병당하고”란 기존 표현을 “남성은 일본군에 병사로 참가하게 되었고, 후일 징병제가 시행되었다”로 변경했다. 관련 사진은 “지원해서 병사가 된 조선의 젊은이들”로 설명했다. 교육출판 교과서는 “일본군 병사로 징병해 전쟁터에 내보냈다”는 기술에서 ‘징병해’를 빼버렸다.

한·일 관계 개선의 최대 현안이었던 강제동원 관련 표현에선 강제성을 드러내는 표현을 약화한 것이 주목된다. 도쿄서적의 경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해 “강제적으로 끌려와”라는 표현을 “강제적으로 동원돼”로 바꿨다. 끌려왔다는 표현이 일본 정부가 사실상 사용을 금지한 ‘강제연행’에 가까운 뜻이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교과서에는 ‘강제’ 혹은 ‘동원’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문교출판은 “일본의 공장과 광산 등에서 많은 조선과 중국 사람에게 노역을 시켰다”는 기존의 표현을 유지했다.

 

이 같은 내용은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무상이 지난 9일 일본 중의원(하원)에 출석해 강제동원에 대해 “어떤 것이든 강제노동 조약상 강제노동에 해당되지 않는다. 강제노동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또 다른 한·일 간 첨예한 문제인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은 없다. 원래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서술은 없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만 수록되기 때문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28일 교과서 검정심의회를 열어 2024년도부터 초등학교에서 쓰일 교과서 149종이 심사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현행 '병사가 된 조선의 젊은이들'로 돼 있는 자료사진 설명을 '지원해서 병사가 된 조선의 젊은이들'로 바꾼 도쿄서적 6학년 사회 교과서. 연합뉴스

◆삭제된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과정 등에 대한 기술도 개악됐다. 도쿄서적 기존 교과서에 있던 “식민지가 된 조선의 학교에선 일본어 교육이 시작되는 한편, 조선의 역사는 가르치지 않아 사람들의 자긍심이 깊이 상처받게 됐다”는 내용이 그런 경우다. 새 교과서에서는 조선인의 민족적 상실감에 대한 내용을 삭제하고 “일본어 교육이 시작되는 한편,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엄격히 제한됐다”고만 기술했다.

 

일본문교출판은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삭제했다. 기존에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있다’는 등의 잘못된 소문이 퍼져 많은 조선인이 살해되는 사건도 일어났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새 교과서에선 전체 피해자 숫자만 뭉뚱그려 제시하는 데 그쳤다.

 

도쿄서적, 교육출판 등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는 기술을 유지했다.

 

전근대기 양국 최대 충돌 사례인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조선의 국토가 황폐해지고, 많은 조선인이 희생됐다”(일본문교출판)는 내용이 빠졌다. 대신 이 출판사는 교과서에 “조선에서 전쟁이 잘 진행되지 않아 큰 피해가 나올 뿐이었다”고 왜군의 피해와 관련한 기술을 보탰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與 당혹… “관계 정상화 물꼬 텄는데 日 찬물”

 

정부는 28일 일본 교과서의 과거사 왜곡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지난 수십년 동안 이어온 무리한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킨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주한 일본대사관 대사 대리를 초치(招致)해 항의했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통해 독도를 “역사·지리·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라며 “독도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주장도 수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는 바”라고 말했다. 일제 강제동원 기술에 대해선 “강제성을 희석하는 방향으로 변경된 것에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며 “일본 정부가 스스로 밝혀온 과거사 관련 사죄와 반성의 정신을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이번 역사 교과서 검정과 관련해 외교 채널을 통해 우리 정부에 양해를 구하거나, 정보를 공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日대사대리 초치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된 28일 구마가이 나오키 주한일본대사대리(가운데)가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초치되고 있다. 남제현 선임기자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은 이날 구마가이 나오키 주한일본대사관 총괄공사를 주한일본대사대리 자격으로 초치해 일본의 이날 초등 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에 강력히 항의했다. 외교부는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 일본대사가 일시 귀국해 총괄공사를 대사대리 자격으로 초치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도 이날 대변인 명의 성명에서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기술한 일본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수정·보완본을 일본 정부가 또다시 검정 통과시킨 것에 대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항의하며, 즉각 시정할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교육부는 특히 일제강점기 ‘징병’의 강제성을 약화한 일본 검정 교과서가 검정 통과한 것과 관련해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를 위해 일본 정부는 우리 영토와 역사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즉각 중단해 주기를 바란다”고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한·일 정상회담 이후 ‘너무 양보했다’는 비판론에 시달리며 내심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를 기대하던 여권은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지난 16일 일본 수도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열린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 참석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오른쪽)가 윤석열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는 모습. 도쿄=연합뉴스

대통령실은 일본의 왜곡된 교과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이날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우리 정부가) 적절하게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며 “필요하다면 입장을 내겠다”고 말을 아꼈다. 대통령실은 전날 같은 질문에도 “해당 부처(외교부)에서 적절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답했다.

 

국민의힘은 일본 정부의 결단을 촉구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옛날부터 갖고 있었던 군국주의적 사고, 이런 틀에서 못 벗어나고 국제적 흐름이나 국제 우호, 친선 등을 따라가지 못한 일본의 문제이자 잘못”이라며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정부를 향해 “윤석열 대통령의 역사적 결단을 되새겨야 한다”고 요구했다.

 

주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 방일과 관련해 “그게 무슨 한·일 정상회담 결과가 잘못돼 그렇다는 것은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사항”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강제동원 제3자 배상 굴욕안의 대가가 바로 이것이냐”며 강하게 비판했다. 박홍근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대통령 혼자서만 극진하게 대접받고 온 ‘오므라이스·소맥’ 환대의 대가가 강제 동원 부정과 독도 주권에 대한 야욕에 대해 눈감아주는 것이었나보다”고 비꼬았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곽은산·유지혜·홍주형·송민섭 기자